색소폰 연주자 리 코니츠가 지난 4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올 해 그의 나이가 만 92세였으니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나 또한 몇 전 전부터 그의 새 앨범을 들을 때마다 여전한 연주력에 감탄하면서도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나름 그의 떠남에 마음의 준비를 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번 그의 사망은 뜻 밖이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사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가 나이니만큼 그 또한 지병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이러스의 치명적 위험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은 여유 있게 그 자신과 주변 모두 세월을 정리하고 끝을 준비하는 시간을 거칠 줄 알았다. 그것이 오랜 시간 꾸준히 활동하며 거인의 발자국을 남긴 그에 걸맞은 죽음이 아닐까?
10대에 전문 연주자의 삶을 시작해 75년 이상을 활동하면서 그는 쿨 재즈, 포스트 밥, 아방가르드 재즈를 넘나드는 폭 넓은 활동을 했다. 하지만 늘 그는 한 스타일에 경도되지 않았다. 그를 시기에 따라 쿨 재즈 연주자, 아방가르드 재즈 연주자로 분류할 수 있어도 그렇다고 그는 쉽게 다른 연주자들과 섞이지 않았다. 늘 차별화된 그만의 모습을 유지했다. 쿨 재즈, 아방가르드 재즈 등을 추구했다기 보다는 그의 음악적 충동이 때로는 쿨 재즈와 때로는 포스트 밥이나 아방가르드 재즈의 영역과 우연히 교차했을 뿐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창의성을 따랐다고만 할까? 그것도 일관되게 말이다.
리 코니츠는 1927년 10월 13일 시카고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혈통의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음악적인 집안은 아니었지만 7세 때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해 이후 색소폰으로 옮겼다. 이 때부터 그는 스탠더드 곡을 연주하기 전에 즉흥 연주를 먼저 즐겼다고 한다.
그는 1945년부터 전문 연주자의 길을 시작했다. 당시는 찰리 파커와 비밥의 시대였다. 그러나 평소 빅 밴드 재즈를 즐겨 들었던 그는 찰리 파커의 빠르고 거친 톤의 연주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한 세대 앞선 레스터 영의 가볍고 부드러우며 시정 가득한 연주에 영향을 받았다.
1946년 작은 칵테일 바에서 함께 연주하며 인연을 맺은 피아노 연주자 레니 트리스타노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이 피아노 연주자는 클래식의 정교한 화성과 섬세한 리듬의 운용, 그리고 직관적이고 자유로운 즉흥 연주 등으로 쿨 재즈를 넘어 아방가르드 재즈의 단초를 제시했다. 이것은 그대로 리 코니츠에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1949년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 <Birth Of The Cool>에서의 인상 깊은 연주로 이어졌다. 사실 이 앨범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지만 빅 밴드 오케스트라를 이끈 클로드 손힐과 오케스트라의 멤버로 참여한 제리 멀리건과 리 코니츠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Moon Dreams”에서 리 코니츠의 이지적인 연주는 후에 붙여진 것이지만 “쿨의 탄생”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리 코니츠는 레니 트리스타노와 퀸텟 혹은 섹스텟 편성으로 상황에 따라 리더 역할을 바꿔가며 여러 차례 스튜디오 녹음을 했다. 그 중 리 코니츠를 리더로 한 연주가 앨범 <Subconscious-Lee>로 발매되었는데 매끈하고 시원한 톤의 청량한 연주와 가벼운 사운드가 (당시에는 제대로 주목 받지 못하고 있던) 쿨 재즈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게 했다.
이후 그는 제리 멀리건과 함께 한 <Lee Konitz Plays with the Gerry Mulligan Quartet>, 원 마쉬와 함께 한 <Lee Konitz with Warne Marsh> 같은 앨범을 비롯해 수 많은 앨범을 녹음했다. 한 해에 여러 장의 앨범을 녹음하고 발매할 정도로 매우 왕성한 활동이었다. 그 결과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녹음한 앨범 중 리더 앨범만 해도 150장이 넘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수 많은 앨범을 녹음하면서 리 코니츠는 제대로 된 워킹 밴드- 고정된 멤버와 지속적인 호흡 속에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음악을 완성해 나가는 밴드를 이끌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레니 트리스타노, 원 마쉬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 장 이상의 앨범을 함께 녹음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주자 개인에 관한 것이었을 뿐 밴드 자체는 고정적이지 않았다. 1950년대 초반 스칸 켄튼 오케스트라 멤버로 활동한 것을 제외하고 그는 늘 바로 그 시간에 맞는 연주자와 앨범을 녹음했다. 그 결과 레니 트리스타노, 마일스 데이비스, 원 마쉬, 오넷 콜맨, 찰스 밍거스, 찰리 헤이든, 폴 모시앙 등 어제의 거장들부터 빌 프리셀, 케니 워너, 브래드 멜다우, 댄 테퍼 등 지금의 재즈를 이끌고 있는 연주자들, 나아가 프랑코 단드레아, 엔리코 라바, 마르시알 솔랄, 미샤 멩겔베르그, 프란츠 코글만, 스테파노 볼라니, 야콥 브로 등 유럽 연주자들까지 시대와 장소를 아우른다. 심지어 만 80세였던 2008년에는 당시 15세의 한국인 2세 색소폰 연주자 그레이스 켈리와 앨범 <GRACEfulLEE>를 녹음하기도 했다.
이처럼 수 많은 만남 속에서 리 코니츠는 늘 언제나 그 자신이었다. 상대의 연주를 경청하고 호흡하며 연주했지만 그만의 개성-이지적인 톤으로 테마를 섬세하게 파고들어 아직 발견되지 않은 낯선 부분을 찾아내곤 했던-을 유지했다.
거창하게 후배나 동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 하지도 않았다. 여러 연주자와 만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는 것에 만족했을 뿐이다. 아예 그는 워킹 밴드를 결성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이것이 그를 75년간 현역으로서 꾸준하고 왕성한 활동을 할 수게 했다. 새로운 앨범 녹음은 늘 그에게 모험 같은 것이었고 그만큼 모든 앨범은 음악적 결과와 상관 없이 새롭고 신선했다. 결코 지난 날의 자신에 기대지 않았다.
한 해에 여러 장의 앨범을 녹음할 정도로 바쁜 삶이었지만 리 코니츠에게도 위기의 시절이 있었다. 그는 1961년 앨범 <Motion>을 녹음한 후 약 3년간 공백기를 가졌다. 인기 하락이 원인이었다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사실 이 무렵 재즈는 오넷 콜맨의 등장과 함께 프리 재즈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보다 자유롭고 실험적인 음악이 수용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과거 레니 트리스타노, 원 마쉬 등과 함께 했을 때부터 시대를 앞선 감각을 보였던 리 코니츠에게 이러한 환경 변화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훌쩍 재즈계를 떠난 것이다.
활동을 멈춘 후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페인트공과 정원사 등의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갔다. 이후 1965년 3월 찰리 파커의 사망 10년을 기념하는 카네기홀 콘서트 무대에 올라 “Blues For Bird”를 독주하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복귀 후 그는 미국을 넘어 유럽으로 활동의 폭을 넓혔다. 80년대에는 거의 유럽에 살다시피 했다. 그래서 복귀 후 그의 앨범은 스티플체이스, 소울 노트, 필롤로지, 드래곤, 라벨 블레 등 유럽 레이블에서 주로 제작되었다.
한편 리 코니츠는 자작곡과 스탠더드 곡을 고르게 연주했다. 그렇다고 레퍼토리를 폭 넓게 가져가지는 않았다. 그 중 스탠더드 곡의 경우 특정 곡을 수 없이 연주하곤 했다. 주어진 곡을 얼마나 자신이 얼마나 새로이 연주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같은 곡을 여러 번 연주해도 늘 신선하게 연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반복된 연주는 새로운 곡의 창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What Is This Thing Called Love”를 바탕으로 “Subconscious Lee”를 쓴 것을 비롯해 “Thingin’”, “Dream Stepper”, “No Splice”, “Palo Alto” 등의 곡을 각각 “All The Things You Are”, “You Stepped Out of a Dream”, “You’d Be So Nice to Come Home To.”, “Strike Up the Band.” 등의 스탠더드 곡에서 영감을 얻어 썼다.
리 코니츠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단독자의 삶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는 수 많은 연주자를 만나 함께 했지만 늘 자신에 충실했고 특정 스타일에 매몰되지 않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연주를 추구했다. 그러니 과연 누가 전염병에 의해 그가 세상을 떠나리라 예상했을까? 삶은 그래서 늘 모순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리 코니츠 앨범 5선
리 코니츠의 앨범 중 그를 대표할 수 있는 앨범을 5장만 고르긴 너무 힘들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앨범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기에 있어서는 초기 앨범들이 많아 여기서 다수 선택해야 하지만 전체를 거칠게나마 조망하기 위해 크게 시대를 구분해 선정했다.
1. Lee Konitz with Warne Marsh (Atlantic 1955)
색소폰 연주자 원 마쉬, 기타 연주자 빌리 바우어 등과 퀸텟 혹은 식스텟 편성으로 녹음한 앨범. 쿨 재즈의 담백함과 부드러움 속에 비밥의 열정이 어우러진 개성 강한 연주를 담고 있다.
2. Motion (Verve 1961)
베이스 연주자 소니 달라스, 드럼 연주자 엘빈 존스와 피아노 없는 트리오 편성으로 녹음한 앨범. 이후 전개될 포스트 밥의 모범이 될만한 음악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앨범 이후 리 코니츠는 활동을 몇 해 동안 멈춘다.
3. Toot Sweet (OWL 1982)
리 코니츠는 듀오 연주를 즐겼다. 이 앨범도 피아노 연주자 미셀 페트루치아니와의 듀오 연주를 담고 있다. 아직 만 20세가 되지 않았음에도 완숙한 피아노 연주자와 50대 중반임에도 여전히 젊은 그의 대화가 정겹다.
4. Sound Of Surprise (RCA Victor 1999)
기타 연주자 존 애버크롬비, 색소폰 연주자 테드 브라운 등과 퀸텟을 이루어 연주한 앨범. 여기서 리 코니츠는 70대의 나이가 무색한 신선한 연주로 나이와 시대는 그에게 아무 의미 없음을 보여주었다.
5. Live At Birdland (ECM 2011)
2009년 피아노 연주자 브래드 멜다우, 베이스 연주자 찰리 헤이든, 드럼 연주자 폴 모시앙과 함께 했던 버드랜드 클럽 공연을 담은 앨범. 누가 리더라고 할 수 없는 쿼텟 연주에서 리 코니츠는 80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젊은 창의적 연주를 펼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