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재즈를 대표하는 노장 연주자 중 한 명인 베이스 연주자 앙리 텍시에의 음악적 매력은 앨범마다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풍경을 그리게 하는 것에 있다. 이를 위해 그는 늘 바로 지금 여기에 집중했다. 그 동안 여러 연주자와 다양한 편성의 그룹을 결성하며 유랑자적 기질을 보여주었던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그런데 2018년도 앨범 <Sand Woman>는 상대적으로 이야기보다 연주자 개개인의 존재감이 더 강하게 드러났다. 음악적 상상력보다 연주 자체에 보다 집중하게 했다.
같은 멤버로 녹음한 이번 앨범 <Chance>는 조금 다르다. 총 8곡 중 절반을 밴드 멤버의 곡으로 채울 정도로 멤버 개인의 지분을 넓히긴 했지만 그 사운드는 한층 더 정돈되었으며 유기적인 흐름으로 곡마다 새로운 상상을 자극한다.
앙리 텍시에의 베이스 솔로로 시작되는 첫 곡 “Cinecitta(영화)”가 대표적이다. 세바스티앙 텍시에의 클라리넷과 벵상 레 깡의 색소폰이 유랑자적 정서를 제시하고 이를 마뉘 코디자의 기타가 증폭하는 이 곡은 제목처럼 서정미 가득한 이탈리아 고전 영화를 그리게 한다.
프랑스 여성 해방을 이끌었던 시몬느 베일과 사형제도 폐지에 앞장섰던 전 법무부장관 로베르 바댕테르에게 헌정하는 “Simone et Robert”에서는 기타-베이스-드럼이 제시한 우아하고 숭고한 테마를 이번에는 클라리넷과 색소폰이 정서적으로 확장한다. 여기에 1993년도 앨범 <An Indian’s Week>의 수록곡으로 또 다른 시몬느, 영화 배우 시몬느 시뇨레를 주제로 했던 “Simone Signoret”의 테마가 앙리 텍시에의 베이스 연주 중 슬쩍 드러나는데 이것은 그동안 그의 음악을 꾸준히 들어왔던 감상자에게는 작은 재미를 주는 한편 시몬느 베일에 대한 베이스 연주자의 존경이 정치적인 것이 아닌 인간적인 것임을 느끼게 한다.
우리 은하가 속한 라니아케아 은하단을 의미하는 “Laniakea”에서도 도입부에서의 심벌의 울림과 몽환적인 기타가 이 우주를 상상하게 하지만 전체를 지배하는 멜랑콜리한 정서는 결국 무한에 대한 상상보다는 우주 속 작은 인간에 대한 사색을 유도한다. 이 우주의 유영은 다음 곡 “Le Même Fleuve(같은 강)”에서 물 위의 유람으로 이어진다.
비교적 빠른 템포의 곡들도 마찬가지다. 충분한 솔로로 멤버 개개인의 탁월한 능력을 확인하게 하면서도 결국은 그들의 어울림이 만들어 낸 이야기에 주목하게 한다. 무용가 피나 바우슈를 주제로 한 “Pina B. – Pour Pina Bausch”의 흔들림은 그대로 무대 위의 혁명을 만들어 낸 무용가의 극적인 움직임을 그대로 상상하게 한다. 앨범에서 가장 역동적인 “Jungle Jig” 또한 그룹 전체의 유연한 움직임이 솔로 이상으로 돋보인다.
앙리 텍시에의 베이스 솔로로 이루어진 “Standing Horse”와 진격의 북소리 같은 고티에 가리그의 드럼 연주가 인상적인 타이틀 곡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마치 하나의 곡처럼 연결되어 평원을 질주하는 말을 그리게 한다.
이번 앨범을 통해 앙리 텍시에는 다시 한번 매혹적 음악적 상상력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를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 구현하는데도 성공했다. 감히 나는 2000년도 앨범 <Remparts D’Argile> 이후 최고의 앨범이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