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연주자 맥코이 타이너가 지난 3월 6일 금요일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나이가 만 81세였고 뉴저지의 집에서 세상을 떠난데다가 2019년 4월 뉴욕의 아펠 룸(The Appel Room) 공연 이후 활동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갑작스러운 사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적어도 가족들은 그의 떠남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는 왼손으로는 마치 타악기를 두드리는 듯 천둥처럼 강렬한 타건과 블록 코드로 풍성한 울림을 만들어 냈으며 오른손으로는 날렵하게 질주하는 중에도 서정적인 멜로디를 만들곤 했다. 이러한 그의 연주는 그에 앞선 피아노 연주자들의 모범을 따른 것인 동시에 향후 등장한 연주자들이 따르고 싶어했던 그만의 개성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개성 넘치는 연주는 시간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전문 연주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순간부터 그는 완성된 연주자의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는 그의 성장 환경이 큰 역할을 했다.
13세에 피아노를 시작하다
전체 이름이 알프레드 맥코이 타이너인 그는 1938년 12월 11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어머니는 미용사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남들보다는 비교적 늦었다고 할 수 있는 13세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재능이 있었는지 그의 어머니는 이듬 해 미용실로 사용하던 큰 방에 피아노를 두고 아들이 개인적으로도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그가 피아노에 빠질 수 있었던 것에는 그의 집 가까이 피아노 연주자 버드 파웰과 리치 파웰 형제가 살고 있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알려졌다시피 버드 파웰의 비밥의 탄생을 이끈 혁신적 피아노 연주자였으며 동생 리치 파웰 또한 클리포드 브라운과 맥스 로치 퀸텟에서 활동하는 등 24세의 젊은 나이에 클리포드 브라운과 함께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이 형제의 집에는 피아노가 없었다. 그래서 이웃 맥코이 타이너의 집에 피아노 연습하러 오곤 했다. 그래서 10대의 맥코이 타이너는 전문 연주자, 그것도 당시로서는 가장 앞선 스타일의 연주를 펼쳤던 인물의 연주를 옆에서 들으며 자신의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그래서 맥코이 타이너는 여러 피아노 연주자 가운데 버드 파웰을 자신에게 영향을 준 우상으로 언급하곤 했다.
한편 그는 고등학교 시절 그라노프 음악 학교에서 클래식 수업을 받는 동시에 개인적으로 타악기를 배웠는데 이 또한 그의 리듬 감각과 피아노를 두드리듯 연주하는 것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존 콜트레인과의 인연
맥코이 타이너를 이야기할 때는 존 콜트레인 쿼텟에서의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그와 존 콜트레인은 1960년 6월부터 함께 했다. 당시 최고의 색소폰 연주자로 비상을 거듭하고 있었던 색소폰 연주자에 비해 피아노 연주자는 전문 연주자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예에 불과했다. 존 콜트레인과 함께 하기 전 맥코이 타이너는 1959년 12월에 녹음된 트롬본 연주자 커티스 풀러의 앨범 <Imagination>을 녹음하면서 레코딩 뮤지션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1960년 커티스 풀러와 함께 재즈텟의 멤버가 되어 1960년 앨범 <Meet The Jazztet>을 녹음하고 같은 해 6월 역시 트롬본 연주자와의 인연으로 알게 된 트럼펫 연주자 프레디 허바드의 앨범 <Open Sesame>에 참여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존 콜트레인이 이 신예를 자신의 밴드에 합류시킨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색소폰 연주자와 피아노 연주자의 인연이 그보다 훨씬 더 전에 시작되었기에 가능했다. 맥코이 타이너는 16세부터 필라델피아와 근처 아틀란틱 시티에서 리듬앤 블루스를 연주하며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런 중 1957년 트럼펫 연주자 칼 매시가 이끄는 밴드에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 밴드의 연주를 존 콜트레인이 보게 되었다. 1957냔 존 콜트레인은 마약 문제로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해고되고 델로니어스 몽크와 함께 하면서 동시에 <Blue Train>을 비롯한 자신의 리더 앨범을 녹음하는 등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라델피아의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 때 알게 된 두 사람은 12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음악적으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1958년 1월 존 콜트레인이 맥코이 타이너가 쓴 “Believer”를 녹음한 것은 두 사람의 음악적 관계가 매우 깊었음을 알려준다. 어쩌면 이 무렵 존 콜트레인은 언젠가 맥코이 타이너를 자신의 밴드에 합류시키리라 마음 먹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존 콜트레인이 만 21세의 피아노 연주자를 자신의 밴드에 합류시키기로 했던 것은 의외의 상황 때문이었다. 1960년 5월부터 7월까지 9주간 존 콜트레인은 뉴욕의 클럽 재즈 갤러리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스티브 쿤(피아노), 스티브 데이비스(베이스) 피트 라 로카(드럼)으로 이루어진 쿼텟을 결성했다. 그런데 한달 반 정도 공연을 이어간 후 스티브 쿤이 탈퇴한 것이다. 그 무렵 맥코이 타이너는 재즈 텟의 일원으로 근처의 빌리지 뱅가드 클럽에서 공연을 했다. 마음이 급한 색소폰 연주자는 평소 마음에 두었던 피아노 연주자를 불렀다. 피아노 연주자 또한 주저 없이 부름에 응했다.
클래식 쿼텟에서 빛났던 존재감
맥코이 타이너는 1965년 말까지 5년여를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맥코이 타이너 외에 지미 개리슨(베이스), 엘빈 존스(드럼)가 함께 했던 존 콜트레인 쿼텟은 “클래식 쿼텟”이라 불릴 정도로 재즈 쿼텟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쿼텟은 존 콜트레인의 음악적 완성을 함께 했다. 동시에 밴드 멤버에게도 매우 중요한 역사로 남았다.
맥코이 타이너의 경우 이전까지 무영에 가까운 연주자에서 재즈계의 중요 연주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색소폰 연주자가 이끄는 그룹의 일원이라고만 하기에 그의 피아노 연주는 그룹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색소폰 연주자가 자신의 음악을 구상하고 실현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존 콜트레인은 그의 연주가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하늘을 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존 콜트레인 쿼텟의 멤버로 첫 번째 공식 스튜디오 앨범이었던 <My Favorite Things>부터 그의 연주는 빛났다. 알려졌다시피 그룹에 가입하고 4개월 만인 1960년 10월에 녹음된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은 싱글로 발매될 정도로 보기 드문 존 콜트레인의 히트 곡으로 모달 재즈의 정점이자 이후 색소폰 연주자가 나아갈 아방가르드 재즈의 단초를 엿보게 했다. 여기서 맥코이 타이너는 왈츠 리듬 위로 두 개의 코드를 반복해 연주하면서 색소폰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또한 그 스스로도 원곡의 서정미를 연장한 투명한 솔로로 곡의 분위기를 가라앉지 않게 했다.
1961년 색소폰 연주자가 아틀란틱 레이블을 떠나 임펄스 레이블로 옮기고 베이스 연주자로 지미 개리슨이 합류하면서 클래식 쿼텟의 역사가 시작된 후 그의 존재감은 더욱 더 커졌다. 그는 존 콜트레인이 원하는 스타일에 늘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Ballads>나 <John Coltrane and Johnny Hartman>처럼 낭만 가득한 앨범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부드럽고 서정적인 연주자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며 <Live at Birdland>처럼 하드 밥의 극한, 후배들이 개척할 포스트 밥의 실마리를 담은 앨범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격정적이고 뜨거운 연주를 펼쳤다.
한편 존 콜트레인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 받은, 후에 아프리카 정교회가 존 콜트레인을 성인으로 추앙할 정도로 기독교를 넘어선 종교적 신비를 머금은 앨범 <A Love Supreme>에서는 색소폰 연주자가 몰아(沒我)의 경지로 상승하는 순간에도 차분하고 명상적인 연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여기에는 18세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던 그의 종교적 신념이 작용했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맥코이 타이너는 단순히 리더의 지시를 따르는 사이드맨 역할을 넘어 리더의 생각을 공유하고 지향점에 공감해 그 스스로 적극적으로 이를 구현하려는 참여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존 콜트레인과 별개로 독자적 인기를 얻게 했다.
1965년 11월 앨범 <Meditations>를 녹음하고 그는 존 콜트레인 쿼텟을 과감히 탈퇴했다. 당시 존 콜트레인은 기존 클래식 쿼텟에 색소폰이나 드럼 등을 추가하면서 보다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다. 여기에 그 또한 동조했다. 그러나 라시드 알리가 두 번째 드럼 연주자로 추가된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두 드럼으로 인해 그의 피아노가 밴드에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홀로 길을 나서다
맥코이 타이너가 존 콜트레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룹 내에서의 역할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을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 그는 1962년부터 그룹을 떠날 때까지 이미 6장의 리더 앨범을 녹음했다. 그런데 이 앨범들은 함께 한 연주자가 각각 달랐을 정도로 쿼텟 활동에 주력하면서 짬짬이 여가를 즐기듯 녹음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그만큼 쿼텟에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강렬하지만 한층 날렵한 연주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곡에 따라서는 오스카 피터슨의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분위기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존 콜트레인을 떠난 후 그의 모습은 달랐다. 그는 1967년 존 콜트레인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블루 노트 레이블과 새로이 계약하고 첫 앨범을 녹음했다. 앨범 타이틀은 <The Real McCoy>. 존 콜트레인의 피아노 연주자가 아닌 리더 맥코이 타이너를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타이틀이었다. 그에 걸맞게 이 앨범에서 그는 이전 존 콜트레인 쿼텟의 역동적이고 진중한 모습을 계승하면서도 조금은 더 절제되고 정돈된 음악을 들려주었다. 이후 3년간 블루 노트 레이블에서 녹음한 다른 앨범들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 때부터 그는 작곡에도 집중해 자작곡으로 앨범을 채우곤 했다. 그 가운데 <The Real McCoy>에 담긴 “Passion Dance”, “Contemplation”, “Search for Peace”, “Blues on the Corner” 같은 곡은 스탠더드 곡처럼 여러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곡이 되었다.
블루 노트 레이블에서 녹음했던 앨범들은 맥코이 타이너를 알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익을 만들지는 못했다. 잠시나마 택시 운전을 고민해야 했을 정도로 연주할 기회가 적었다.
70년대에 전성기를 보내다
상업적 이익이 적었다고 해서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1970년도 앨범 <Bitches Brew>가 가져온 퓨전 재즈의 열풍 속에서 많은 피아노 연주자들이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하며 새로운 호응을 얻었을 때도 그는 이와 상관 없이 어쿠스틱 피아노만을 고집했다.
많은 연주자들이 새롭고 도시적인 스타일의 퓨전 재즈를 향했을 때 그는 오히려 보다 이국적인 방향을 선택했다. 1972년 마일스톤 레이블로 이적해 처음으로 녹음한 앨범 <Sahara>에서 그는 피아노 외에 타악기, 플루트, 고토 등을 연주하며 동양과 아프리카의 정서가 혼재된 색다른 음악을 선보였다. 존 콜트레인의 후기 아방가르드 재즈를 맥코이 타이너만의 방식으로 보다 정제하고 순화한 것이라 해도 좋은 음악이었다 그런데 이 앨범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 앨범은 그를 대표하는 앨범으로 손꼽히곤 한다.
<Sahara>의 성공 이후 그는 마일스톤 레이블에 1981년까지 머무르면서 솔로부터 빅 밴드까지 다양한 편성을 바탕으로 존 콜트레인의 유산을 라틴 음악의 색채를 가미하는 등 자기식으로 발전시킨 음악을 이어갔다. 그 중 1973년에 녹음한 앨범 <Enlightenment>는 피아노 연주자가 지닌 창조력의 정점을 보여준 앨범이었다.
1980년대에도 한 해에 여러 장의 앨범을 녹음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1970년대처럼 하나의 음악적 지점을 향해 다채롭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레이블도 정해진 곳 없이 콜럼비아, 블루 노트, 마일스톤, 임펄스, 타임리스 등을 오갔으며 그만큼 앨범마다 기복도 심했다.
그렇다고 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솔로부터 빅 밴드를 오가며 꾸준히 앨범을 녹음했다. 그 중 빅 밴드 앨범 <The Turning Point>(1991)나 타악기가 가세한 퀸텟 앨범 <Infinity>(1995)는 그를 대표하는 앨범이라 할 정도로 매우 인상적인 음악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 꾸준함마저 60대에 접어든 2000년대에는 유지할 수 없었다. 이 시기 그의 앨범 녹음은 확연히 줄었다. 그래도 음악적 진지함은 여전했다. 그 중 색소폰 연주자 조 로바노와 함께 한 앨범 <Quartet>(2007)과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으로 론 카터(베이스), 잭 드조넷(드럼)과 함께 한 트리오를 바탕으로 빌 프리셀, 존 스코필드, 마크 리봇 등 당대 최고의 기타 연주자들과 협연한 <Guitars>(2008)은 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할 정도로 훌륭했다.
사실 1970년대에 대중적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존 콜트레인 쿼텟 이후 그의 연주와 음악은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대중의 기대보다 한 단계 더 진보적이고, 한층 더 진지했으며 한결 더 무거웠다. 대신 그의 연주와 음악은 빌 에반스만큼이나 많은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그의 음악과 연주 스타일은 여전히 우리 곁에 영원할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타이너의 타계 소식을 이제 접하네요. 콜트레인 쿼텟 유럽투어에서 팀의 일원으로서 장대한 몰아의 경지를 보여주며 이 쿼텟 멤버로서는 다소 소극적?이지 않은가 했던 개인적인 편견을 깨 버린 뒤라 낯선청춘님이 러브 수프림의 타이너에 대한 견해가 와 닿습니다. 쿼텟 이후로는 블루노트의 앨범 밖에는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소개해주신 인라잇먼트를 꼭 찾아 들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지구의 육신을 벗고 우주에서 콜트레인과 재회한 피아니스트에게 늦게나마 추모의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고맙습니다. 사실 저도 한동안 존 콜트레인의 피아노 연주자로 그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솔로 앨범들에서 그리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 그것이 아니구나 했죠. ㅎ
그의 앨범들 좋은 감상하시기 바랍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