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9일은 색소폰 연주자 오넷 콜맨의 90번째 생일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헛된 미련에 가깝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전쟁을 제외하고 죽음으로 세상에 의미를 남기지 않는다. 존재함으로써 의미를 만들고 남긴다. 다른 때도 아닌 바로 그날-1930년 3월 9일-에 태어났기에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후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색소폰 연주자의 9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단순히 추억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구조의 근간부터 자유롭게 사고하다
요즈음 재즈를 들으면 나는 현재 재즈가 보이고 있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지형도가 오넷 콜맨에서 비롯된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그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물론 그에 앞서 재즈의 방향이나 속도를 바꾼 거장들이 있었다.
루이 암스트롱,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등이 그랬다. 루이 암스트롱은 즉흥성을 재즈의 중요 요소로 부각시킨 개척자였고 찰리 파커는 즉흥 연주를 확장하기 위해 코드와 그 진행을 과감히 바꾼 혁명가였다.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는 자신의 취향, 직관에 따라 재즈의 유행을 만들어냈던 혁신가였다. 그런데 세 거장들은 재즈를 새롭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중에 곡의 구조는 건드리지 않았다. 코드 진행의 긴장도를 높여 색채감을 부여하거나 반대로 단순화시켜 이완의 공간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블루스 형식이나 “AA’BA”로 대표되는 일반 대중 음악의 형식을 존중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화로운 음악, 어울리는 연주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약속이 필요했고 그것이 구조였으니 말이다. 리더를 중심으로 연주에 참여하는 멤버들은 앞으로 전개될 코드의 진행을 외우고 이를 기반으로 연주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루이 암스트롱부터 마일스 데이비스는 정도나 스타일에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선상에 놓인다.
그런데 오넷 콜맨은 달랐다. 여기서 더욱 인식의 폭을 넓혔다. 그는 즉흥 연주가 아닌 구조 자체를 건드렸다. 견고하게 재즈를 지탱하던 경계를 허물었다. 기존의 구조에 구애 받지 않는, 구조부터 자유로운 연주를 생각했다. 진정한 “프리 재즈”를 제시한 것이다. 1960년 12월에 녹음해 이듬해에 선보인 앨범 <Free Jazz>는 그 선언이었다. 이 앨범에서 오넷 콜맨은 당시 자신이 이끌고 있던 색소폰-트럼펫-베이스-드럼으로 구성된 쿼텟 외에 같은 구성의 다른 쿼텟을 따로 불러 더블 쿼텟을 구성했다. 그리고 자신의 쿼텟은 스피커의 왼쪽 채널에 에릭 돌피가 주축이 된 다른 쿼텟은 오른쪽 채널에 두고 최소한의 작곡 개념을 전제로 40여분간 즉흥 연주를 펼쳤다. 그 즉흥 연주는 악기들의 고정된 역할마저 해방시켰다. “집단 즉흥 연주”라는 부제가 이를 의미했다.
보통의 감상자에게 이 더블 쿼텟의 연주는 완벽한 혼돈, 무질서로 들릴 것이다. 앨범 커버 이미지로 사용된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작품 <The White Light>처럼 말이다. 그래서 “프리 재즈”를 일체의 규칙, 규범을 거부하는 재즈로 이해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지만 찰리 파커가 기존 코드를 유사한 코드로 바꾸고 진행을 세분화한 것에서 나아가 그는 새로운 구조를 스스로 만들려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구조는 기존 구조의 단순한 파괴, 해체가 아니었다.
이후 그의 음악이 <Free Jazz>에서의 어지러움이 아닌 작곡이 강조된 방향으로 흘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특히 1990년대에 화성, 멜로디, 리듬 등에서 연주자들이 기존 규범과 달리 자유로이 연주하고 그것이 모여 만든 공감의 지점이 음악적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을 지향했던 하몰로딕스(Harmolodics) 이론은 그가 꾸준히 새로운 음악 형식, 구조에 관심을 가져왔음을 생각하게 했다.
<Free Jazz>이전에는 어딘가 뒤뚱거리는 듯한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Tomorrow Is the Question!>, <The Shape of Jazz to Come>, <Change of the Century> 같은 도전적 앨범 타이틀과 달리 블루스, 비밥에 등을 돌리지 않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개인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그의 음악이 계속되었다면 어땠을까? 궁금하다.) 1970년대에 일렉트릭 기타를 편성에 넣고 펑키한 리듬을 넣어 프리 펑크 스타일로 당시 인기를 얻고 있던 퓨전 재즈에 자기 식으로 호응했을 때나, 아프리카의 민속 음악 연주자들과 함께 했을 때도 그의 음악은 남들과 달랐지만 형식 자체를 무시하지 않았다. 무형식의 형식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Skies Of America>를 녹음하는 등 보다 독창적 구조에 기반한 음악을 만들려 했다.
멜로디 감각 또한 출중했다. ‘Lonely Woman’, ‘Turnaround’, ‘When Will the Blues Leave?’, ‘The Blessing’ 등 활동 초기에 선보였던 곡들은 많은 연주자들이 꾸준히 연주하고 감상자들이 좋아하는 스탠더드 곡의 반열에 올랐다. 이들 곡들은 오히려 독창성으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신선한 느낌을 준다.
재즈를 대하는 자세, 정신이 남긴 영향
지금도 많은 연주자들이 찰리 파커의 연주에 영향을 받아 그에 버금가는 연주를 하기 위해, 마일스 데이비스 같은 질감의 음악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재즈의 역사가 몇 번의 전복적인 변화를 통해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과거와 완벽히 단절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재즈는 확실히 거듭된 단절이 아니라 분절과 지속을 통해 발전해왔다.
그런데 오넷 콜맨이 현대 재즈에 기진 영향은 찰리 파커나 마일스 데이비스와는 다른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의 영향은 단순히 하몰로딕스 같은 음악이론이라 연주 스타일에 있지 않다. 물론 많지는 않지만 그의 음악을 연구하고 이를 계승하고 따르려는 시도도 있다. 그러나 감히 말하지만 나는 오넷 콜맨의 음악적 영향은 이보다는 재즈를 대하는 자세, 정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재즈를 이야기할 때 거론되곤 하는 스윙, 즉흥 연주, 블루스 같은 음악 요소들 대신 “자유 정신”이 우선임을 깨닫게 했다. 그는 자유로운 상상에 기반한 음악, 이전과 다른 방식의 음악이라면 기존 재즈와의 관련성과 상관 없이 재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연주해도 괜찮은 것일까? 저렇게 작곡해도 문제가 없을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을 잊게 했다.
재즈가 미국을 떠나 유럽의 민속 음악과 클래식 전통과 어울려 다른 질감의 재즈로 발전하게 된 것,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토속 악기와 그 음악과 결합해 가상의 공간을 그리게 하는 이국적인 재즈로 확장하게 된 것도 모든 음악적 상상은 재즈가 될 수 있다는 자유로운 생각에 기인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현재 재즈가 시대를 지배하는 특정 사조 없이 연주자에 따라 모습이 다른, 지극히 개인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도 크게 보면 오넷 콜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가능하다. 실제 그 때문에 재즈가 너무 어지럽게 되었다고, 50,60년대가 재즈가 가장 재즈다웠던 시대였다며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거대 담론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작은 세계가 병존하며 조화와 충돌을 거듭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가지 많은 나무 같은 재즈의 현재는 시대에 적합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자연스레 재즈가 지금의 모습으로 나아갈 운명이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넷 콜맨이 없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의문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넷 콜맨이 있었기에 적절한 시점에 재즈가 현대화의 길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오넷 콜맨이 없었다면 재즈는 발전 없이 지금은 향수의 대상이 되어버린 지난 시대의 음악 중 하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차원에서 오넷 콜맨은 5년 전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아마도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30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