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악과 재즈를 색다른 방식으로 결합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안다. 재즈와 국악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오래 전부터 있었음을. 하지만 초기 시도들은 악기의 만남 이상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다소 모호한 음악, 크게 보면 크로스오버 혹은 퓨전 재즈에 속하는 음악이 만들어지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이런 음악에 그리 깊게 공감하지 못했다. 국악은 “우리 음악이 이렇게 양악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논리는 충분하지 못하면서 소리 질러 말하는 것 같았고 재즈는 악기의 변화만으로 새로운 스타일이라고 공허하게 주장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최근의 시도들은 재즈는 재즈대로 국악은 국악대로 그 자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무엇인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어 주목할만하다. 만남 자체에 집중한다고 할까? 물론 이것은 자기 주장 강한 두 사람이 만나 어울리지 못하는 대화로 끝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계산으로 정부 야당과 여당이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잘 되면 그만큼 멋진 것은 없을 것이다. 그 잘됨에는 공감이 필요하다. 음악적으로 접점을 애써 찾으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상대 음악을 듣고 그에 반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형식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다 자유로운 재즈 족의 노력이 더 필요하지 않나 싶다.
아무튼 피아노 연주자 정은혜의 이번 앨범은 국악과 재즈의 공존을 통한 새로운 음악의 생성이라는 차원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담고 있다. 이번 앨범에서 그녀는 첼로 연주자 지박, 드럼 연주자 서수진 그리고 국악 명창 배일동과 함께 즉흥 연주를 펼쳤다.
연주는 형식적으로는 배일동의 창에 다른 세 연주자가 반응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것도 정해진 악보 없는, 순간의 감흥에 의한 연주가 창 뒤편에서 파도처럼 넘실댄다. 그렇다 보니 겉으로 보면 배일동의 창에 다른 세 연주자가 고수 대신 추임새를 넣는 연주를 펼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배일동의 창마저 자유롭게 흐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첫 곡 “저고리”에서는 “사랑가”가 재일본 조선학교의 노래인 “저고리” 앞에 등장한다. “소생”에서는 “심청가”와 함께 구음이 피아노-첼로-드럼과 숨결을 나눈다. 이렇게 창조차 순간순간 흐름을 바꾼다. 그럼에도 네 사람 모두 자유로운 연주 속에 정서적으로 하나를 이루었기에 5곡의 제목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래서 이 순간의 어울림은 오래 전부터 견고히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은 거대한 서사-높은 하늘과 깊은 바다,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로 감상자를 압도한다.
이러한 만남 혹은 존재들의 부딪힘이 가져온 높은 예술적 성취의 중심에는 정은혜의 구상, 구성과 연주가 있다. 지박, 서수진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녀는 타건을 바탕으로 창의 뒤에서 혹은 그 사이에서 냉정한 관찰자와 격한 공감자를 오가는 연주로 정서적 흐름을 완벽히 제어했다. 여기서 말하는 제어란 통제, 제한이 아니라 정돈, 유도를 의미한다.
여기에 배일동의 창을 특별히 언급해야 한다. 그는 폭포수 같은 우렁찬 목소리로 자유롭게 창을 하는 것을 넘어 사운드의 중심, 서사의 중심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이 자유로운 에너지의 교차와 흐름의 기반을 마련했다. 감히 말하며 그가 없었다면 정은혜의 구상은 신선하지만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정은혜는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라면서 국악에 지속적인 관심을 부어 이를 바탕으로 연주를 이어오고 있다. 배일동은 그녀에게 국악의 깊이를 알려주었다. 결국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강렬한 이 음악의 기반에는 오랜 공감이 있었다. 그것이 재즈와 국악이 있는 그대로 만나 통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