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모험의 연속이다. 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낯선 상황에 나를 두곤 한다. 진학이나 취업, 그리고 이를 위한 준비가 대표적인 예이다. 성공하면 보다 충만한 삶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으며 힘겨운 한 발을 내딛지만 그와 함께 내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불안이 뒤 따른다. 그러나 어쩌랴. 삶이 그러한 것을. “내일에 대한 확신”은 가정만 가능할 뿐이다.
게다가 아무리 보다 나은 내일을 믿어도 이를 위해 현재를 견디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이다. “지금을 즐겨라”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를 유혹한다. 이에 현혹되어 일탈을 잠시 하기도 한다. 그리고 찾아오는 보다 큰 후회, 미래가 더욱 멀어졌다는 느낌!
내 경우 가장 큰 인생의 모험은 프랑스로 떠났을 때였다. 사실 그 때 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않았다. 현실 도피에 더 가까웠다. 그저 이곳만 아니면 어디든 상관 없었다. 그런데 도피로 생각한 프랑스는 또 다른 불안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모든 것은 불확실했고 불안했다. 목적조차 없었기에 하루하루는 무의미했다. 그런 시간이 이어질수록 불안은 더욱 커졌다. 이러다가 그냥 흔적도 없이 현실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역설적이게도 한국에서보다 더욱 더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했다. 스스로 위로하며 하루를 견뎌야 했다.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야 했다. 스스로 떠나온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했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의 주인인 베이스 연주자 박기만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연주자로서 보다 발전하고자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불확실한 내일을 위해 고생스러운 현재를 견디는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그 불안을 극복하고 공부를 마쳤다.
이번 앨범은 한 젊은이의 유학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적 독백”이라는 뜻의 앨범 타이틀부터 이번 앨범이 젊은 베이스 연주자가 겪은 인생의 한 시기-무더운 여름날 같았던-를 생각하게 한다. 실제 이번 앨범은 긴 시간의 비행 끝에 낯선 도시에 도착해 이방인으로 살다가 그 삶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모험을 위해) 그 곳을 떠나는 과정을 상상하게 해준다.
예를 들어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Gate”는 긴장을 지속하는 리듬 섹션 위로 조정현의 트럼펫이 길을 찾듯 긴장 속을 맴도는 연주가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도착한 한 청춘의 불안한 마음을 그리게 한다. 이어지는 “Anxiety”는 제목처럼 새로이 시작한 삶이 주는 불안을 그린다. 리듬은 한층 더 무겁고 긴박하며 트럼펫은 우울을 머금었으며 기타는 불안을 잠재우려는 듯 강렬하다.
낯선 환경에서 느끼는 내적 불안은 관계에 대한 불안으로 확장된다. “Stranger”나 “Unfamiliar City”가 이를 그린다. 이 두 곡은 화려한 도시의 모습과 그 속을 살아가는 현지인들과 섞일수록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사는 이방인으로서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젊은 연주자의 외로움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Can’t Wait Any Longer”부터 이 이방인의 삶은 바뀐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불안을 견디는 것이 버거운 청춘의 외침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실은 그렇게 불안에 잠식된 채 살 수 없다는 적극적 삶을 향한 외침이다. 그래서 같은 긴박한 리듬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이건민의 피아노와 박기만의 베이스, 신동진의 드럼으로 이어지는 솔로 연주는 충동과 에너지로 넘친다. 어떠한 것도 뛰어넘을 수 있겠다는 기세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다 보니 이제 낯선 도시는 제법 낭만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달콤한 것은 물론 쓰디 쓴 경험도 아련한 추억으로 쌓여간다. 조정현의 트럼펫이 전면에 부각된 “Reminiscence”가 바로 불안으로부터 한층 자유로워져 자신만의 삶을 살게 된 젊은이의 여유로운 마음을 그리게 한다. 이것을 두고 새로운 삶에 적응되었다고 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안정적인 삶은 록의 질감을 머금은 오정수의 기타와 신스 프로그래밍이 전면에 나선 “Symmetric”을 통해 더욱 확실해진다. 얼핏 보면 거친 기타 톤이 불안을 생각하게 할 지도 모르지만 단단한 토대 위에 비상을 거듭하는 기타 연주는 정 반대로 불안을 극복한 젊은 연주자의 의지를 상징한다.
아름다운 추억이 쌓이면 낯설고 불안했던 공간은 이제 다시 돌아오고픈 친숙한 곳이 된다. 내 삶의 한 시기를 머금은 곳, 내가 기억을 잃더라도 그 시기의 나를 증명해줄 거리와 건물 그리고 친구들이 있는 곳이 된다. 남예지의 허밍이 가세한 따뜻한 서정을 지닌 곡 “I’m Looking Forward to Seeing You Again”이 이를 그린다.
다소 장황하지만 내가 앨범을 들으며 떠올린 이야기를 곡 단위로 풀어보았다. 그렇다고 박기만이 풀어낸 그의 삶에만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 이번 앨범의 훌륭함은 사실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다. 앨범의 모든 곡들은 내가 설명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이야기를 드러낸다. 감상자로 하여금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렇게 들린다”가 아니라 “연주를 듣고 나니 그런 이야기가 떠오른다”라고 말하게 한다. 작곡, 편곡 연주 모두가 박기만이 설정한 정서, 분위기를 향해 수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행하는 듯한 분위기는 “Gate”라는 제목이 아니어도 다른 어느 곡보다 반복적인 성격이 강한 리듬 섹션과 그 위로 솟아오르는 솔로를 통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Anxiety”는 어떠한가? 이 또한 제목에 앞서 공간을 다 채우려는 듯 질주하는 드럼, 그 사이를 파고드는 거친 숨소리 같은 기타, 고뇌하듯 소리지르는 트럼펫 등을 통해 복잡하고 어두운 감정의 심연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Can’t Wait Any Longer”는 “Anxiety”와 대조되는 느낌으로 한층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마음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I’m Looking Forward to Seeing You Again”의 경우 회상조의 허밍과 시정(詩情) 어린 피아노 연주를 통해 모든 극적인 상황이 정리되고 평화로운 결말을 맞는 영화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박기만 자신을 포함한 6명의 연주자의 비중을 곡마다 다르게 가져간 것도 감상자를 연주의 진미를 맛보는 것에서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으로 이끈다. “Unfamiliar City”의 피아노 트리오 연주, “Reminiscence”에서의 트럼펫이 전면에 나선 쿼텟 연주, 오정수에게 전권을 일임한 듯한 “Symmetric”, 그리고 짧지만 인상적인 존재감을 보인 남예지의 허밍이 가세한 곡 “I’m Looking Forward to Seeing You Again” 같은 곡들이 그렇다. 연주자의 고성과 비중이 변화함에 따라 곡들은 이야기를 발전시킨다. 연주자마다 특정 역할이 부여된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할 정도다. 악기들의 대조와 조화가 극적인 효과를 만들고 그것이 곡들의 연결을 통해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 내는.
박기만은 유학 기간 중의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이 앨범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가 외국에서 어렵게 공부했으니 알아달라는 의도로 앨범을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이를 버티고 극복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는 부단한 노력으로 미래의 불안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이 멋진 앨범이 바로 그 증거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 이야기를 발산하는 앨범의 곡들을 순서대로 감상하면 당신은 박기만의 유학 시절에서 나아가 당신이 겪었던 인생의 어려운 모험을 그려보게 할 것이다. 내가 (유학이 아니었던) 나의 프랑스 시절을 떠올렸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시기를 겼었기에 지금의 당신이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현재의 또 다른 어려움을 이길 용기를 낼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