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상상하게 만드는 음악을 좋아한다. 이 곳이 아닌 다른 곳, 지금이 아닌 다른 어느 시간으로 나를 이끄는 음악이라면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재즈야 말로 가상의 여행에 가장 적합한 음악이라 생각하고 있다.
음악을 따라 가상의 시공간을 유영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신 또한 밤에 더 마음에 들어오는 음악이 있고 낮에 더 마음에 들어오는 음악이 있을 것이다. 또한 바다냐 산이냐에 따라 좋아하는 음악이 다를 것이고 집에서 듣느냐, 운전하며 듣느냐, 아니면 카페에서 듣느냐에 따라 듣고 싶은 곡이 다를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공간의 바닥이 나무냐 시멘트 같은 딱딱한 재질이냐에 따라 생각나는 곡이 다르다.
이것은 곡을 쓰고 연주하는 뮤지션도 마찬가지이다. 순수하게 내면의 의지에 따라 곡을 쓰고 연주하는 것 같지만 그들 또한 외부 세계와 소통하며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사회, 정치 소식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거나 그렇지 하고 긍정의 반응을 보일 때를 생각하자. 순간적이고 생각 없는 반응으로 보이지만 그 뒤에는 여러 경험과 학습을 통해 설정된 관점이 자리잡고 있다.
연주자도 마찬가지로 수 없이 연주하던 곡이라 해도 어떤 시공간에 위치하냐에 따라 이전과는 다른 연주를 펼친다. 작곡의 경우는 더할 것이다. 추상적인 의미의 곡이라도 현재 그의 좌표를 무시할 수 없다.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피아노 연주자 이한얼의 새로운 트리오 앨범 <Unexpected Fly>때문이다. 이번 앨범은 첫 번째 트리오 앨범 <Undwissend>와 이에 대한 라이브 앨범 <2017 Mauritius Tour Live> 그리고 즉흥 솔로 앨범 <Piano Improvisations>와는 또 다른 질감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은 매우 다채롭고 역동적이며 아름답다. 사실 내가 이 앨범에 대해 하고픈 말은 이것이 핵심이다.
지난 2015년에 발매되었던 첫 트리오 앨범 <Undwissend>에서 이한얼은 독일에서 공부하던 날의 자신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가 정리한 독일 유학생 이한얼의 모습은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는 불안 가득한 청년, 또한 섬세한 감수성으로 (나처럼)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꾸는 청년이었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내적인 시정(詩情)이 강했으며 움직임은 있으나 그 자리에 맴도는,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생겨나는 물둘레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이번 앨범은 4년의 시간차만큼이나 다르다. 한층 정서적으로 안정적이 되었고 음악적으로도 폭 넓어진 이한얼을 담고 있다. 이것은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서주에 해당하는 솔로 곡 “Walk With You(함께 가자)”에서부터 감지된다. 어느 맑은 날 오후 2시의 나른함 감성을 지닌 이 곡은 제목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동네 한 바퀴를 느긋하게 걷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피아노 솔로 연주이기에 절로 솔로 앨범 <Piano Improvisations>를 떠올리게 하는데 고독하고 내적인 긴장이 많았던 2017년의 연주에 비한다면 이 곡은 정겹고 푸근하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은 마음 푸근한 사람의 연주이다.
본격적인 트리오 연주의 시작을 알리는 “Yule’s Blues”는 어떤가? “율”자를 돌림으로 쓰는 이한얼의 두 아들이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는 이 곡은 블루스 형식을 바탕으로 가볍고 산뜻한 리듬과 솔로가 펼쳐진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언제 어디로 움직일 지 모르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닮았다. 전반부의 즉흥 솔로조차 긴장 속에서도 유쾌한 정서를 드러낸다. 아이와 함께 오는 아빠의 흐뭇함이랄까? 그렇다 흐뭇한 블루스다. 게다가 이 블루스 곡은 극적인 진행의 모습을 보인다. 풍경이 아닌 이야기를 그리게 하는 것이다.
앨범에서 가장 역동적인 “Unexpected Fly”도 그렇다. 앨범에서 이 곡은 가장 전통적인 트리오 연주의 미학을 보여준다. 즉, 세 악기의 농밀한 인터플레이가 핵심을 이룬다. 이 곡에 대해 녹음 당일까지 이한얼은 연주가 어떻게 진행될 지 확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긴장이 멋진 연주를 만들어냈다. 말 그대로 뜻밖의 비행을 하게 된 셈인데 여기에는 베이스 연주자 김도영, 드럼 연주자 김종현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은 이한얼의 솔로가 상승을 거듭할 때 비행을 지탱하는 기류처럼 분위기를 지속시키는 연주와 솔로 연주로 예상 밖의 비행을 즐겁게 만들었다.
“Animation” 또한 피아노 연주자 혼자가 아닌 트리오 구성으로 인해 의외의 완성도를 이룬 곡이다. 사실 이 곡에서 베이스와 드럼은 매우 단순, 간결한 연주를 펼친다. 그런데 그것이 의외로 같은 공간을 맴도는 듯한 우수 어린 테마에 시간성을 부여했다. 리듬의 담백한 흐름이 극적인 피아노 솔로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처럼 이한얼이 외롭지 않은, 안정적인 연주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적인 삶과 동료들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트리오 연주가 주는 안정적인 느낌은 “Ego”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이 곡은 피아노 솔로 앨범 <Piano Improvisation에서 두 차례 연주했던 것 가운데 첫 번째 연주를 바탕으로 연주한 것이다. 이한얼은 독일 유학 중 실력이 좀처럼 향상되지 않는다는 느낌에 괴로워할 때,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 조금은 실력이 나아진 상황이 오기를 바라며 이 곡을 썼다.
이 곡에서 이한얼은 첫 앨범이나 솔로 앨범처럼 시간 밖에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 연주를 펼친다. 그럼에도 이전의 연주와는 느낌이 또 다른데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이한얼의 연주에 맞추어 베이스와 드럼이 마치 피아노 연주자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처럼 즉흥적인 반응으로 곡에 상승적인 기운을 북돋았기 때문이다. 한 없이 가라앉을 수도 있는 곡에 입체성을 부여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듯한 도약의 정서를 부여한 것이다.
“Grey Sky(회색 하늘)” 또한 트리오 연주가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이한얼은 이 곡을 “Ego”와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썼다. 겨울의 흐린 날, 흐리기에 사물의 윤곽이 더욱 또렷하게 보이던 날에 썼다고 한다. 겨울과 흐림을 주제로 하고 있는 만큼 이 곡은 서정적 우울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주 전체가 침잠의 느낌을 주지 않는다. 겨울 흐린 날의 세세한 풍경을 시간의 흐름 속에 풀어 놓는다. 분위기에 취하면서 정서적으로는 다소 명확하지 않은 인상주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
“유리 조각”은 어떤가? 2018년 12월 31일 한 해를 돌아보며 느꼈던 회한을 그린 곡이라지만 이 또한 아쉬움의 정서를 담고 있음에도 우울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트리오의 어울림은 우울과 상관 없이 연주의 희열, 서로 교감하는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예술적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냥 이한얼의 솔로 연주였다면 분명 이 곡은 슬픔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끝으로 “Mauritius”를 이야기하고 싶다. 이 곡은 이번 앨범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곡이다. 다른 어느 곡보다 또렷한 멜로디와 이를 중심에 둔 솔로 연주의 이어짐은 상당한 정서적 흡입력을 지녔다.
이한얼은 이 곡을 2017년 4월 공연을 위해 아프리카의 동부, 인도양의 남서부에 위치한 섬나라 모리셔스로 떠날 즈음에 섰다고 한다. (참고로 앨범 <2017 Mauritius Tour Live>이 그 공연의 기록이다.)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설렘과 두려움 속에서 썼기 때문일까? 이 곡은 유랑자적 정서로 가득하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노마드적인 운명이 느껴진다. 그래서 다른 어느 곡들보다 슬프다. 하지만 달콤함이 이를 상쇄한다. 그래서 알 수 없는 내일에 불안해 할 지라도 무서워하지 않는, 결국 그 여정을 즐기는 여행자를 그리게 한다. 이러한 긍정성은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이 곡을 들으며 13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가야 도착할 수 있는 모리셔스로의 여행을 그렸다. 당신도 그렇지 않을까?
인생은 꼭 우리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주어진 삶에 순응하라는 뜻은 아니다. 때로는 행운처럼 삶의 파도가 내가 원했던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니 말이다. 즉, 우리 삶은 늘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예상 외의 순간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열심히 나 자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리라.
이한얼은 지난 몇 년간의 삶을 이번 앨범에 담았다. 그것은 정서적으로 한층 성숙해지고 동료와 긴밀히 호흡 속에 정해지지 않는 비행을 과감히 즐기는 삶이었다. 그리고 아름답고 치열한 음악이었다. 이쯤 되면 그의 삶은 헛되지 않았다. 설령 지난 연말 허무함에 유리 조각에 찔린 듯한 아픔을 느꼈다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것은 삶에 충실한 자의 겸손이었다.
첫 번째 트리오 앨범에서부터 완성된 모습으로 드러났던 그만의 개성이 반복되었음에도 이번 앨범이 뻔한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이전과는 다른 예상 외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한얼의 음악은 내 삶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번 앨범과의 만남으로 나는 안정적인 가정 생활이 주는 평온함, 낯선 곳을 향하는 것의 설렘, 동료와 함께 교감하는 것의 짜릿함을 새삼 느꼈다. 그 덕에 내 삶은 이전과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 앨범이 당신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궁금해 진다.
아…연주 좋습니다.! 연주자의 삶의 맥락에 따라 연주를 감상하면 더 풍부해지겠지요..하지만 음악을 듣는 순간 ‘아..좋다..’ 이 느낌이 드네요.
네 참 마음에 드는 앨범입니다. 저도 이한얼씨를 잘 모릅니다. 그냥 한번 잠깐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인데 그래도 그 풍기는 분위기가 음악과 많이 닮았더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