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나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살면서 좋은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이 발생한다고 믿게 되면서 이리 된 듯 하다. 그래서 삶에 보수적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평범한 날이 이어지다 보면 가끔은 톡 쏘는 사건 하나가 생기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것도 마음을 즐겁게 하는, 삶을 행복하게 느끼게 하는 좋은 사건을 원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삶은 평범하게 하루하루가 흐르면서 가끔씩 삶을 긍정적으로 다시금 확인하게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생각하기는 쉽지만 실제 그런 삶을 살기란 매우 어렵다. 이상일 뿐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듣기 감상자들은 귀를 즐겁게 하고 부담 없이 마음에 들어오는 음악을 원한다. 많은 실제 사랑을 받는 음악들은 대부분 듣기에 부담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 인기 있었던 음악과 유사할 경우 인기를 얻지 못한다. 설령 인기를 얻어도 반짝일 뿐이다. 이 말은 곧 익숙하고 편안하면서도 무엇인가 기존과는 다른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Moon(혜원)은 윈터플레이의 멤버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지난 2018년에 발매된 첫 솔로 앨범 <Kiss Me>에 이르기까지 듣기에 부담이 없는 음악을 선보여왔다. 그런데 보통 이런 종류의 음악은 반복되면 뻔한 느낌을 주기 쉽다. 대중적인 친화력이 너무 강조된 결과이다. 흔히 팝 재즈라 불리는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는 연주자나 보컬 중 오랜 시간 인기를 유지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문”도 이런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두 번째 앨범은 쉽고 편안하면서도 신선한 음악을 만들려는 그녀의 의지를 담고 있다.
다채로운 선곡
일단 이번 앨범은 지난 첫 앨범처럼 친숙하고 편안하다. 이것은 앨범에서 그녀가 노래한 곡들의 면모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그녀는 그룹 코어스(The Corrs)의 1997년도 히트 곡 “What Can I Do”를 비롯해 버트 바카락의 곡으로 디온 워윅이 노래해 인기를 얻었던 “Walk On By”, 미니 리퍼튼의 히트 곡 “Lovin’ You”, 1977년 영화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 사용되어 인기를 얻었던 칼리 사이먼의 “Nobody Does It Better”, 2004년 영화 <아메리칸 이디엇>에 사용되어 인기를 얻었던 록 그룹 그린 데이의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등의 팝, 록 히트 곡을 노래했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히트 곡을 노래했으니 거의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선곡이라 하겠다.
또한 그녀는 재즈 애호가라면 친숙한 거쉰 형제가 쓴 “’S Wonderful”과 냇 킹 콜의 노래로 잘 알려진 “Tenderly”같은 스탠더드 곡과 함께 퓨전 재즈의 명곡 중 하나인 마이클 프랭스의 “The Lady Wants To Know”와 노라 존스의 “Those Sweet Words”, 그리고 라틴 음악의 인기 곡 “Sabor A Mi”에 영어 가사를 넣은 “Be True To Me 등 여러 스타일의 곡들을 선택해 노래했다.
이처럼 다채롭고 포괄적인 선곡은 확실히 앨범의 친근감을 높인다. 앨범 타이틀처럼 “부드럽게(Tenderly)” 감상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달콤한 사운드
노래 또한 어렵지 않다. 달콤하며 세련된 분위기로 편안하게 감상자의 귀를 즐겁게 한다. 예를 들어스탠더드 곡 “’S Wonderful”의 경우 지난 앨범에 이어 다시 한번 앨범 제작을 책임진 기타 연주자 고로 이토의 보사노바 리듬위로 물결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문”의 노래가 일체의 고민이 없는 안락한 시간을 그리게 한다. 또 다른 보사노바 스타일의 곡 “Be True To Me”도 마찬가지다. 고로 이토의 솔로 기타와 “문”의 어울림이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난 휴가 같은 공간으로 이끈다.
또한 스트링 쿼텟의 산들바람 같은 소리와 밴드의 화사한 움직임 위로 “문”의 밝은 노래가 흐르는“What Can I Do”는 사랑의 안타까움을 담은 가사에 낙관적인 정서를 부여한다. 이 외에 수록된 모든 곡들은 비현실적이다 싶을 정도로 가볍고 산뜻한 공간에서의 쉼을 제공한다.
편안함 속의 긴장
하지만 “문”의 이번 앨범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 편안함이 무조건 익숙한 스타일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녀는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남들과 다른 새로움을 보여준다. 앨범 타이틀 곡 “Tenderly”가 좋은 예이다. 이 곡은 전반적으로 그 제목만큼이나 온화하다.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에 기분 좋은 저녁을 그리게 한다. 그러나 뒤로 흐르는 연주는 마냥 가볍지만 않다. 적절한 긴장으로 특별한 “Tenderly” 를 만든다. 특히 베이스와 피아노 사이에서 자유로이 움직이는 베이스 클라리넷은 곡 전체에 무게감을 부여한다. 이러한 긴장은 “Walk On By”에서도 반복된다. 다이아나 크롤, 돈 패터슨, 윈튼 켈리 등 여러 연주자와 보컬들이 산책하는 듯한 리듬감으로 해석했던 것과 달리 “문”의 노래는 한층 긴장감이 강하다.
“The Lady Wants To Know”는 어떠한가? 작곡자 마이클 프랭스 자신은 물론 로라 피지, 유러피언 재즈 트리오, 레오 시드란 등에 의해 연주되고 노래되기도 한 이 곡은 보통 원곡처럼 보사노바 리듬이 바탕이 되곤 했다. 그러나 “문”은 과감하게 보사노바 리듬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이 곡에 색다른 질감을 부여했다. 한편 “Lovin’ You”에서는 일렉트릭 기타가 “문”과 대비 효과를 내면서 역시 기존의 여러 해석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정서적으로는 원곡의 사랑스러움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익숙하지만 색다른 해석
한편 (팝) 재즈 스타일로 그리 많이 노래되지 않은 곡들을 노래할 때는 원곡의 정서를 유지하면서 사운드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가 그렇다.“문”은 이 곡을 강렬했던 원곡의 사운드를 밴드 전체의 상승적 어울림으로 순화했을 뿐 전반적으로 그린 데이의 노래와 유사한 느낌으로 노래했다. 그래서 원곡에 담긴 여름처럼 뜨거웠던 청춘의 사랑이 지난 후의 아련함을 다시 느끼게 해준다.
“Nobody Does It Better”의 경우 “문”의 노래는 원곡에 대한 존중이 엿보인다. 그러나 스윙감을 살린 피아노 솔로로만 이루어진 연주는 오케스트라까지 동원되었던 원곡의 극적인 맛 대신 담백한 느낌을 준다. 어느 한적한 클럽에서 피아노 연주자와 눈을 맞대고 노래하는 보컬을 그리게 한다. 이 외에 “Those Sweet Words”는 노라 존스의 노래보다 템포를 느리게 하고 기타 대신 피아노를 중심에 두어 편안함은 같지만 질감은 다른 곡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이번 앨범에서 “문”은 누구나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지향하면서도 흔한 느낌을 주는 것을 지양했다. 가볍고 편안한 흐름 속에 긴장과 색다른 맛을 부여했다. 따라서 보통의 팝 재즈 앨범들에 비해 달달한 맛이 조금은 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싫증은 덜할 것이다. 톡 쏘는 진한 맛에 익숙해져야 커피의 참 맛을 알게 되고 그 맛에 빠져 오랜 시간 곁에 두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