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피아노 연주자 남경윤으로부터 새로운 앨범을 준비했다는 뜻 밖의 전화를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9년 만의 새 앨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2005년 존 남(John Nam)이란 이름으로 <Energy And Angular Momentum>을 발표한 이후 그는 <No Regrets>(2007), <Into A New Groove>(2008) 그리고 <Trio>(2010)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앨범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돌연 9년간 새 앨범 소식이 없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대구에 정착하여 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이자 한 가정의 남편과 아빠로서의 삶, 그러니까 생활인으로서 남경윤의 삶에 보다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 기간 동안 그가 음악과 유리된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앨범을 기획하고 녹음할 여유가 부족했을 뿐 연주 활동은 꾸준히 했다. 무엇보다 삶이 특별한 감흥을 줄 때마다 곡을 쓰곤 했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에 담긴 8곡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자작곡들로 인해 나는 이번 앨범을 남경윤의 지난 9년간의 삶의 요약으로 이해한다. 물론 이전 앨범들에도 그는 자작곡을 선보이곤 했다. 그러나 전 곡을 자작곡으로만 채운 적은 없었다. 보컬의 힘을 빌린 곡도 없다. 또한 남경윤에 따르면 9년간 작곡한 여러 곡들 중에 각 해를 대표하는 9곡을 골라 연주할까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음악에 담긴 그의 지난 9년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보다 긍정과 낙관의 삶이 아니었나 싶다. 마냥 좋았던 일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다. 남경윤의 경우 좌절, 불안보다는 인정, 희망으로 삶의 굴곡을 받아들인 것 같다. 두 번째 곡 “The Great Storm”이 대표적이다. 폭풍이 몰아쳤던 한 여름 밤을 그린 이 곡은 폭풍이라는 무섭고 압도적인 이미지를 매우 밝고 경쾌하게 표현했다. 그렇다고 폭풍에 굴하지 않고 나아가는 인간승리 식의 극적으로 표현하지도 않았다. 안정적인 장소에 굳건히 발을 딛고 거친 바람이 불고 굵은 비가 쉴 새 없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으로 연주했다. 창 밖은 폭풍이 몰아치는데 실내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갖는 느낌이랄까? 긴장을 머금은 테마는 이내 남경윤의 오밀조밀한 솔로로 부드럽게 이완된다.
“Waiting Again”도 마찬가지다. 지루한 기다림을 주제로 한 이 곡을 남경윤은 3박자의 살랑거리는 왈츠 리듬으로 표현했다. 그 결과 테마에 담긴 우수는 달콤함을 띈다. 이러한 달콤함은 “Sleepless Nights”에서도 이어진다. 이 느린 발라드 곡에서 남경윤은 낮의 일을 되짚어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골몰하기도 하는 불면의 밤을 테마 근처를 맴도는 솔로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 불면에는 잠을 자지 못한 것에 대한 괴로움은 없다. 온전한 나로서 고독한 시간을 즐기는 충만이 있을 뿐이다.
한편 앨범에는 연주자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또 내일을 꿈꾸는 남경윤의 마음 또한 담겨 있다. 아리 호닉의 펑키한 드럼 연주로 시작하는 타이틀 곡 “J.A.M”이 그런 경우다. 여기서 “J.A.M”은 “Just About Music”의 약자로 미국 코넬 대학시절 그가 살았던 기숙사를 말한다. 남경윤은 이 곳에 마련된 무대에서 여러 다양한 성형의 연주자들과 연주하며 음악적 역량을 키웠다 한다. 이 외에도 그는 대학원 시절 미시건과 뉴욕에서 잼 세션을 이끌기도 했다. 따라서 이 곡의 제목은 말 그대로 “잼(Jam)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곧 재즈의 즉흥, 만남을 통한 새로움의 창출을 의미한다. 앨범의 마지막 곡“Nostalgia in New York” 또한 뉴욕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대한 추억을 담고 있다. 그 추억을 그는 매우 역동적이고 밝은 분위기로 표현했다.
이를 보면 지난 9년간 남경윤은 조금 더 음악 자체에 매진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의 상황을 안타까워했던 것 같다. 뉴욕의 삶과 대구의 삶을 비교하며 음악적 갈증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수 없는 과거만 그리워하지는 않았다. 4분의 5박자의 뒤뚱거리는 리듬의 “The Next Step”을 통해 그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런데“The Great Storm”처럼 다소 극적일 수 있는 주제임에도 그의 연주는 매우 평화롭고 여유롭다. 이것은 그가 몽상적인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연속으로서의 미래를 꿈꾸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연주를 지속하고 그 반복 속에서 새로움을 이끌어 내려 함을 생각하게 한다. (이번 앨범은 그 첫 결과물일 것이다.)
이번 앨범이 지난 앨범에 이어 다시 트리오 편성을 취하고 있는 것도, 비록 조합 자체는 처음이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앨범에서 함께 했던 드럼 연주자 아리 호닉, 네 번째 앨범에서 함께 했던 베이스 연주자 벤 윌리엄스와 함께 한 것도 9년 사이의 변화만큼이나 연속성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사이 이 사이드 맨들의 세계적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실제 이번 앨범에서도 그는 지난 앨범들에서처럼 차분하고 사려 깊은 연주를 펼쳤다. 최대한 빨리 풀어야 좋은 수학 게임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The Speed Game”에서조차 그의 연주는 속도에 매몰되지 않는다. 지적(知的)인 연주라 할까? 나아가 선이 분명하고 감성적이면서도 어느 순간 감상자의 예상을 벗어난 음의 선택으로 긴장을 살짝 만들어 내곤 하는 솔로는 이제는 그만의 것이라 할 만큼 개성적이다. 단맛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톡 쏘듯 새콤한 맛이 올라온다.
이번 앨범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은 첫 곡 “Fireflies”이다. 남경윤과 오랜 만의 만남을 알리는 이 첫 곡은 동남아 여행 중 보았던 반딧불이의 신비로운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사진보다는 영상에 가깝다. 반딧불이가 반짝이는 밤의 포괄적 모습이 아니라 각각의 반딧불이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다른 템포로 빛을 내는 세부적인 모습이 펼쳐지는 음들로 구성된 인트로와 강약의 조절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 결과 밤의 신비로움은 그에 대한 남경윤의 경이감(驚異感)으로 연결되고 이것은 다시 감상자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우리는 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실제 신생은 꼭 그렇게만 흐르지 않는다. 때로는 그냥 삶의 파도에 나를 맡길 필요도 있다.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어갈 기회가 다시 온다. 목적지에 대한 의지만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남경윤의 이번 앨범은 지난 9년의 기다림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 시간이 더 좋은 음악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이 모두 그가 열심히 주어진 삶을 살았고, 그 삶이 주는 소소한 행복, 깨달음을 지나치지 않고 꾸준히 악보에 옮긴 결과이다. 즉, 일상을 음악으로 생각하고 정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다른 누구보다 음악적 삶을 살았음을 의미한다.
이제 그의 삶이 앨범에 담겨 우리에게 건네졌다. 우리의 삶을 음악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