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연주자들은 새로운 것에 중독된 자들이다. 이들은 남들과 다르고 이전의 나와 다른 새로운 연주,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영역에 몸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은 위험하다. 공허한 외침 이상으로 들리지 않는다.
진정한 새로움은 형식적인 측면이 아니라 연주자만의 무엇이 담길 때 설득력을 획득한다. 이 때 연주자만의 무엇은 그리 심각하고 특별한 것을 통해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유연히 발생한 사소하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도 만들어진다. 예를 들면 새로운 악기의 구입, 새로운 연주자와의 만남, 친한 지인들과의 대화처럼 일상의 평범한 일들이 한 연주자를 남들과 다르게 만든다. 우연이 운명을 만든다고 할까? 같은 곡이라도 연주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것은 그 안에 연주자의 각별한 경험과 감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기타 연주자 탁경주의 이번 앨범도 사소한 사건이 한 연주자의 음악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기타 연주자는 2013년 <Theme From Brooklyn>, 2014년 <Jazz Guitar Classics>, 2016년 <Before Midnight> 등의 앨범을 통해 재즈의 지난 시간에 대한 아련한 향수, 재즈 기타 명인들에 대한 존경을복고적 질감의 낭만적인 연주를 통해 그러내었다.
그에 비해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네 번째 앨범은 보다 강렬하고 현대적인 사운드를 담고 있어 새롭다. 특히 그 동안 탁경주의 이력을 충실히 지켜본 감상자라면 그 새로움은 놀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탁경주를 몇 번의 짧은 만남을 통해 말 수가 많지 않은 차분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앨범의 외향적인 연주에 무척 놀랐다.
이러한 변화는 탁경주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일부러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다. 사소한 사건이 그를 이번 앨범의 쾌활한 사운드로 이끌었다. 바로 새로운 기타로 펜더 텔레캐스터 기타를 구입한 것이 그 사건이었다. 펜더 텔레캐스터 기타는 사실 재즈보다는 블루스와 혹에 더 어울린다. 특히 오버드라이브 이펙트가 걸린 거칠고 두터운 톤이 그렇다. 이에 비해 탁경주가 그 동안 사용했던 깁슨 할로우바디 기타는 일렉트릭 기타이면서도 어쿠스틱 기타의 깔끔한 질감이 매력이다. 따라서 기타의 교체가 음악적 변화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Tele”가 대표적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곡은 탁경주가 펜더 텔레캐스터 기타를 구입하고 처음 작곡한 곡이다. 흥겨운 리듬 위로 펑키하게 질주하는 두터운 질감의 기타 연주가 새 악기에 대한 호기심, 새것이 주는 흥분을 그대로 담고 있다. 거의 곡의 방향을 제시하는 수준의 간결한 테마 뒤로 곧바로 이어지는 솔로 연주가 평소보다 빨라진 기타 연주자의 심장 박동을 느끼게 한다.
기타의 교체가 주는 색다른 맛은 두 개의 연주로 담긴 “Limited Edition”에서도 반복된다. 이 곡은 끈적거리는 블루스 스타일의 곡이다. 여기서 탁경주는 “Tele”보다 더욱 경쾌한 손놀림으로 연주자 자체가 주는 즐거움을 그래도 전달한다. 특히 직선적인 연주 속에 현을 긁고 비브라토를 주는 연주는 주제할 수 없는 순간의 감흥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연주의 즐거움은 앨범 타이틀 곡 “Out Of Control”에서 폭발한다. 탁경주는 이 곡을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꾸었던 통제 불능상태에 빠진 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꿈이었기에 다행이었다는 것일까? 곡에는 일체의 불안이 없다. 상승의 즐거움으로만 가득하다. 설령 다시 하강하더라도 그것은 추락의 불안과 상관 없다. 그저 혈압의 변화로 인한 짜릿함만 있을 뿐이다.
이에 걸맞게 이 곡에서 탁경주는 잠시 정신을 놓은 것 같다. 몰아의 경지에서 질주에 질주를 거듭하는데 그것이 준비된 것이 아니라 1초전 연주가 지금의 연주를, 지금의 연주가 1초 후의 연주를 충동한 결과 같다. 그래서 나는 곡을 들으며 탁경주가 미쳤구나! 라고 혼잣말 했다.
그렇다고 탁경주가 70년대 이후의 퓨전 재즈, 록 재즈나 블루스를 지향했다는 것은 아니다. 펜더 텔레캐스터 기타의 음색에 매혹되어 평소와 다른 기분으로 연주하기는 했지만 연주의 세밀한 부분에서는 지난 앨범들에서 보여주었던 전통적인 재즈 기타 연주에 대한 존중적 태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여행 중 만난 인연에 영감을 얻어 썼다는 “Fon”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데이브 브루벡 밴드의 연주로 알려진 “Take Five”의 4분의 5박자 베이스 라인을 인트로로 재치 있게 차용한 곡에서 탁경주는 흥분을 진정하고 하드 밥 시대에 대한 애정을 담은 솔로를 펼친다.
“Tide” 또한 에미넴의 “Lose Yourself”의 긴장 강한 리프를 변용한 듯한 인트로가 록적인 느낌을 주지만 이내 파도의 넘실대는 모습을 주제로 한 테마와 솔로 연주는 재즈 본연의 맛을 담고 있다.
앨범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을 법한 “On A Walk”도 마찬가지다. 햇살이 화사한 한가한 주말 오전의 상쾌한 산책을 그린 듯한 테마와 느긋한 솔로는 정서적으로는 오늘에 위치하면서도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과거를 향한다.
한편 이번 앨범이 기타의 록적이고 블루스적인 질감에도 불구하고 재즈적인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Before Midnight>에서도 함께 했던 건반 연주자 전용준, 베이스 연주자 신동하와 이번에 새로이 합류한 드럼 연주자 신동진 등 함께 한 연주자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감히 말하지만 이번 앨범은 탁경주의 모든 앨범 중 가장 밴드 전체의 조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리더의 연주를 조력하는 것을 넘어 솔로 연주자로서 적극 자신을 드러내며 탁경주와 흥겨운 대화를 했다.
전용준의 경우 “Tele”에서 신디사이저로 만들어낸 끈적거리는 오르간 사운드로 곡의 흥분 지수를 높이더니 “Fon”에서는 (역시 신디사이저로 만들어 낸) 펜더 로즈를 연상시키는 건반 솔로로 파도의 포말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Out Of Control”에서는 말끔한 피아노 솔로로 곡의 거친 질감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한편 신동하의 경우 “Limited Edition”에서 탁경주와 시합하듯 질주를 거듭하는 한편 “Fon”에서는 현의 굵은 울림이 그대로 드러나는 솔로로 재즈 곡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신동진의 경우 곡마다 록, 재즈, 블루스에 걸맞은 탄성 강한 리듬 연주와 절묘한 강약의 조절로 줄타기 같은 아슬아슬한 연주의 쾌감을 배가시켰다.
결국 탁경주의 이번 앨범은 여러 번 감상해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이전과 다른 질감에 나처럼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듭 들으면 질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탁경주의 핵심, 재즈의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연주를 직조해내는 자세는 그대로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번 듣고 지난 앨범들과의 외적인 차이에 놀라 무작정 낯설어할 필요는 없다. 조금 색다른 탁경주의 음악으로 즐기면 된다. 오히려 이번 앨범은 그의 음악이 보다 폭 넓게 우리 일상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밤의 낭만, 지난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머물렀던 그의 음악이 이제는 긍정적이고 활력 넘치는 즐거운 놀이까지 포용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매일 정장을 입던 사람이 어느 날 청바지를 입고 나타나면 우리는 “보통 무슨 일이야?” 하며 놀라곤 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탁경주의 이번 앨범이 그렇다. 그는 3년 만에 펜더 텔레캐스터 기타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났다. 모습이 새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음악적 핵심까지 변하지는 않았다. 재즈 본연의 맛은 그대로이다.
탁경주는 탁경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