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연주자 도미닉 밀러 하면 스팅의 “Shape Of My Heart”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영화 <레옹>의 주제 음악으로 국내에서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곡은 멜로디도 좋았지만 도미닉 밀러의 기타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도미닉 밀러를 단순히 “Shape Of My Heart”의 공동 작곡가이자 스팅의 투어 멤버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부조리한 일이다. 스팅과의 활동 외에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자신만의 활동을 해왔다. 그 가운데 지난 2017년에 발표된 11번째 앨범이자 ECM에서의 첫 앨범이었던 <Silent Light>은 솔로 연주자로서 그의 세계적 명성을 더욱 견고히 해주었다.
지금까지 그가 선보인 음악은 차분하고 내면적인 것이었다. 이번 12번째 앨범도 그 기조는 여전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기에 프랑스 인상주의적인 분위기를 강조했다는 것이 다르다. 특히 늘 볕이 좋은 남 프랑스에 체류했던 반 고흐가 강하게 느껴진다.
무슨 말인가 하는 감상자도 있을 것 같다. 뜬금 없이 웬 프랑스에 인상주의냐며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이 기타 연주자가 남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기에 가능했다. 그는 남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인상주의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상주의 예술과 남 프랑스의 정서를 그는 이번 앨범에서 그리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과 오랜 시간 함께 한 벨기에 출신의 베이스 연주자 니콜라스 피즈만, 프랑스 출신으로 스팅 밴드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드럼 연주자 마뉘 카체, 키보드 연주자 마이크 린드업 등 오랜 친구들과 최근 아르헨티나에서 찾아낸 반도네온 연주자 산티아고 아리아스가 가세한 5인조 밴드를 결성했다. 자신의 기타를 중심으로 타악기를 더했던 <Silent Light>의 단출한 편성과는 자못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인상주의가 주제라면 작은 편성의 연주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앨범은 그런 예단을 벗어난다. 그는 인상주의를 그냥 그림처럼, 하나의 느낌으로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인상주의는 그는 남 프랑스의 화사한 햇살,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독한 술과 지독한 숙취가 만나 만들어진 입체적인 것이었다. 그가 앨범을 위해 작곡을 시작하기도 전에 앨범 타이틀을 “Absinthe”로 정했다는 것이 이를 말한다.
압생트는 알코올과 허브를 섞어 증류해 만든 술로 녹색의 요정 혹은 녹색의 악마라 불리며 프랑스에서 와인만큼이나 큰 사랑을 받기도 했다. 특히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이 술을 즐겼다고 한다.
앨범은 바로 이 압생트로 시작한다. 도미닉 밀러의 차분한 나일론 기타 솔로로 시작되는 이 곡은 중반까지 서정미를 유지하며 허브처럼 향긋한 내음을 풍긴다. 하지만 마뉘 카체의 비트 연주가 가세하면서는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취기를 발산한다. 형상이 빛의 흔적으로 바뀐다.
반 고흐를 주제로 한-또한 폴 사이먼 밴드의 기타 연주자였던 빈센트 은구이니를 위한 곡이기도 하다- 마지막 곡 “Saint Vincent”도 독한 술이 주는 상승감이 적절한 악기 배치를 통해 드러난다. 반면 “Verveine”는 심신안정, 해독 등의 효과가 있다는 허브 차를 말한다. 도미닉 밀러도 즐겨 마신다고 하는데 그에 걸맞게 온화한 리듬과 잔잔한 멜로디가 흐르는 짧은 연주가 마치 숙취 해소를 해주는 듯 하다.
한편 도미닉 밀러가 리더답게 앨범 전반에서 섬세한 기타 연주로 귀를 사로잡지만 음악적으로 보면 그는 중심에서 살짝 뒤로 물러선 듯한 느낌을 준다. 멜로디를 독점하지 않고 반도네온이나 건반과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움직임은 선이 아니라 면으로 퍼져나간다. 미술에서의 인상주의가 사물이 아닌 빛이 중심이 되었던 만큼 말 그대로 인상주의적 분위기를 그리기 위해서였을까?
멜로디의 공유는 반도네온의 존재감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Ténèbres(어둠)”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이 곡에서 반도네온은 어둠을 밝히는 화사한 빛 같은 역할을 한다. 곡 전체에 흐르는 무거운 분위기를 도미닉 밀러의 기타와 함께 밝은 곳으로 상승시킨다. “Bicycle”에서도 반도네온은 자전거를 화사한 햇살이 비추는 남 프랑스의 한 시골길에 위치시킨다. “Mixed Blessing”도 마찬가지. 이 곡은 제목과 달리 평온한 산책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여기서도 기타만큼이나 반도네온이 도드라진다.
반도네온에 대한 강조는 “Ombu”처럼 남미의 뿌리가 넓은 나무를 주제로 한 곡으로 이어진다. 프랑스 인상주의를 그리다가 남미로 넘어간 것이 이상하게 보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니믹 밀러가 미국인이지만 출생은 아르헨티나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가 현재 살고 있는 남 프랑스의 화사한 햇살이 남미의 햇살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 이 곡 “Ombu”에서는 반도네온만큼이나 그와 대비효과를 만들어 내는 마뉘 카체의 역동적인 드럼 또한 인상적이다. 그리고 “Eudue”에서는 마이크 린드업의 건반이 기타, 반도네온과 함께 보다 정교한 어울림으로 감상의 즐거움을 더한다.
도미닉 밀러는 이번 앨범을 이야기하면서 곡을 썼을 때는 그냥 셀카 같았던 것이 그룹을 만들어 연주한 후에는 전문 사진가가 빛을 활용해 삶을 표현한 사진처럼 되었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다른 차원에서 적극 동의한다. 그는 남 프랑스나 인상주의 미술을 그냥 정적인 그림처럼 그리지 않았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햇살이 허브 꽃을 피게 하는 남 프랑스, 그 화사한 빛의 산란(散亂)을 포착하려는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을 영상처럼 표현했다.
앨범을 들으니 남 프랑스 자전거 여행을 해보고 싶다.
곡을 들으면서 반도네온소리에 계속 귀가 갔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반도네온이 내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앨범에서 반도네온 소리는 자신의 음색만 완전히 튀지 않으면서 곡에 잘 녹아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전체 구성이 잘 짜여져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연주자도 어떤 분인지 궁금하게 만드네요..
저도 반도네온을 아주 좋아합니다. 소리에서 사람이 궁금해지는 것 당연한 일이죠. 글에서도 사람이 궁금해지니 말입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