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상상을 한다. 음악이 이끄는 대로 이 곳이 아닌 다른 가상의 공간을 여행하곤 한다. 그 여행이 매혹적일수록 음악에 대한 호감 또한 높아진다. 이것은 음악을 만드는 창작자나 음악을 구현하는 연주자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음악을 통해 자신의 상상, 자신이 머리 속에서 본 세계를 감상자에게 전달하려 한다. 그런데 소리로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창작자, 연주자의 손을 떠난 음악은 감상자를 만나 변화를 거친다. 이를 싫어하는 연주자나 창작자들은 인터뷰를 통해 직접 말로 자신이 본 이미지를 설명하거나 글을 통해 설명하곤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직접 이미지를 제작해 보여주곤 한다.
웨인 쇼터의 이번 앨범이 바로 그런 경우다. 총 3장으로 이루어진 이 앨범은 단순한 음악 앨범이 아니다. 감상자는 음악만 듣는 것에서 나아가 앨범에 함께 수록된 만화를 보면서 웨인 쇼터가 음악에 담으려 했던 이야기와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앨범은 음악과 그림이 만난 일종의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13년, 그러니까 웨인 쇼터가 오랜만에 블루 노트 레이블에서 발매한 앨범 <Without A Net>을 발매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앨범을 발매한 후 그룹은 34명으로 구성된 오르페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했다. 당시 공연이 마음에 들었는지 웨인 쇼터는 스튜디오에서 같은 편성으로 공연에서 연주했던 네 곡, 그러니까 이번 앨범의 첫 번째 앨범에 담겨 있는 “Pegasus”,”Prometheus Unbound”, “.Lotus”, “.The Three Marias”을 녹음했다.
그런데 이 것이 끝이 아니었다. 새로이 작곡한 곡과 이전 앨범에서 연주했던 곡을 모아 놓은 이 4곡을 묶어 웨인 쇼터는 “Emanon”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이 곡을 바탕으로 슈퍼 영웅 “Emanon”-“No Name”을 거꾸로 쓴 것이다-이 등장하는 공상과학적 이야기를 상상했다. 그리고 이를 극작가 모니카 슬라이의 도움으로 완성했다. 다시 몇 년 후 블루 노트 레이블의 수장 돈 워스가 이번에는 평소 좋아하던 만화가 랜디 두버크를 소개했다. 랜디 두버크는 웨인 쇼터와의 깊은 이야기를 바탕으로“Emanon”에 관한 만화를 그렸다. 그리고 음악과 만화를 묶어 이번에 앨범으로 발매하게 되었다.
글세, 이 리뷰를 쓰는 나 또한 랜디 두버크의 만화를 보지 못해 “Emanon”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오케스트라가 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여기에 웨인 쇼터의 색소폰이 세부적인 이야기를 진행하는 음악은 충분히 서사적이다. 어느 우주 영웅이 난관을 헤치고 승리에 도달하는 과정을 그리게 해준다. 하지만 네 곡이 시간 순으로 묶여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각 곡이 영웅이 만날 수 있는 가능한 세계를 그린다고 할까? 양자역학에서의 평행우주 혹은 다중우주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전통적인 시공간을 벗어난 이야기, 그리스 로마 신화의 페가수스, 프로메테우스와 불교의 연꽃이 겹치는 세계 말이다.
한편 이번에 발매된 앨범에서 “Emanon”과 연관된 연주, 그러니까 오르페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연주는 첫 번째 앨범만 해당한다. 나머지 두 장의 앨범은 오케스트라 없이 그룹만 런던에서 가졌던 공연을 담고 있다. 연주한 곡들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곡들과 대동소이하다. 이 공연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는 또 다른 감흥을 전달한다. 나는 사실 이 쿼텟 연주가 더 마음에 든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연주는 매혹적이긴 했지만 웨인 쇼터를 비롯한 그룹 연주자들의 과감한 연주가 상대적으로 감추어졌다는 느낌을 주었다면 런던 공연에서의 연주는 다르다. 앨범 <Without A Net>에서 맛볼 수 있었던 탄탄한 호흡과 세밀한 편곡을 바탕으로 연주자 개인의 상상력을 덧댄 솔로 연주가 짜릿한 감흥을 선사한다. 특히 27분이 넘는 길이로 긴장을 유지하며 서사적 여행을 하는 듯한 연주가 이어지는 “The Three Marias”가 대단하다.
런던 공연에서 더 큰 만족을 느낀 만큼 나는 자신의 상상을 만화로 친절하게 설명하려 했던 웨인 쇼터의 의도가 음악적으로는 역효과를 내지 않을까 걱정이다. 음악은 언어로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 추상성이 음악을 예술로 이끌지 않던가? 따라서 연주자와 감상자 사이의 간극을 그냥 두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자신의 음악을 더 믿었더라면 좋았으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