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밤을 좋아한다. 자연인으로서의 나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낮 시간 동안 회사의 직책, 누구의 남편, 아빠로 지내던 나는 고요한 밤의 정적 속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렇다고 밤에 무슨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듣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전부다. 게다가 그 시간 또한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온전히 나만을 위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 설령 그 시간이 단 몇 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행복감이 매우 크다. 사회인으로서의 내 일상을 긍정적으로 보내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피아노 연주자 민경인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는 재즈와 팝을 가로지르는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그 활동에 비해 자신의 앨범은 2008년에 선보였던 하늘 높이가 유일하다. 그렇다고 10년간 음악 활동을 게을리한 것도 아니었다. 전제덕, 말로, 웅산, 이은미, 박선주, BMK, 서영도, 적우, 조성모, 박광현, 임태경 등 가요와 재즈의 실력파 뮤지션들의 앨범 녹음 및 제작, 그리고 공연을 함께 했다. 여기에 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몇몇 공연과 페스티벌의 음악 감독으로 역량을 발휘해오고 있다.
이처럼 지금까지 그의 활동은 상당히 다양했다. 그리고 그 활동을 다른 연주자나 학생 그리고 관객을 향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법.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The Things You May Feel In Your Daily Life> 는 바쁜 활동을 뒤로 하고 그동안 드러내지 못했던 자신을독백처럼 풀어낸 음악을 담고 있다.
앨범을 통해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자신이다. 그러니까 재즈 피아노 연주자, 펑키한 건반 연주자, 팝 피아노 연주자가 아닌 그냥 피아노 연주자 민경인이다.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모든 것을 떨치고 연주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만 충실한 상태에 자신을 놓은 것이다.
실제 이번 앨범에 담긴 그의 음악은 어느 한 장르로 규정하기 어려운 지점에 놓이는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연주한 재즈인 것 같기도 하고 투명한 피아노의 질감이 돋보이는 뉴에이지나 클래식 음악 같기도 하다. 또 서정적인 멜로디만을 두고 보면 노래로 만들려 했던 곡의 순수한 연주 곡 같기도 하다.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음악의 자장 안에 있으면서 슬쩍 모래처럼 그 손아귀를 벗어나는 음악이다. 어느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어쩌면 음반 매장 관리자만이 분류할 수 있는, 그저 민경인의 피아노 연주 음악이라 하겠다. 그렇기에 마음을 편히 내려놓은 듯한 연주가 편안하게 다가온다.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우리는 가장 순수한 자신을 만나 성찰의 시간을 갖곤 한다. 민경인 또한 부수적인 것들을 내려놓고 순수한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 약간의 환경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은 제주도. (제주도민이 아니라면) 국내에서 가장 이국적이며 가장 독립된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던가? 나아가 그는 그는 앨범 녹음을 위해 스튜디오를 찾지 않았다. 서귀포 바다가 보이는 보통의 건물 3층에 피아노를 힘겹게 올린 후, 그곳에서 정원의 야자수, 멀리 있는 범섬을 보며 자신만의 일기를 쓰듯 편안하게 연주했다. 그냥 녹음만 하지도 않았다. 밥도 해 먹고 술도 마셨다. 그 사이 하늘과 파도는 시간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그렇다면 피아노 연주자 민경인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냈을까? 그는 삶 속에 불현듯 떠오르곤 했던 소소한 단상(斷想), 그러면서도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소중한 생각들을 통해 자신을 이야기했다.
9곡의 제목들이 이를 말한다. 유한한 삶 속에서 “영원”의 약속을 생각하고 그 속에서의 생의 약동을 가져다 주는 “우연”을 기대한다. 그것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초면”, “상상과 현실 속의 만남”) 또한 만남은 늘 이별을 수반한다.(“헤어짐 앞에서”) 그리고 그것은 추억으로 자리잡는다.(“멀리 떠나간 친구”) 그러면서 인연의 유동성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때로는 무너질 수 있는 법”) 그리고 유동적이지 않은 가족에 대한 사랑을 생각한다.(“I Care About You”,“나의 가족을 생각해”) 이것은 다시 이별 없이 모든 관계가 지속되는“영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하는 것이다. 살면서 겪게 되는 우리의 근심과 행복 속에는 영원과 우연,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내가 아닌 타인-사랑, 가족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그래서 결국 이 앨범에 담긴 민경인의 사유와 연주는 그 또한 그의 음악을 듣고 있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번 앨범의 친근한 분위기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한편 피아노로 표현한 민경인의 생각은 서정적 희망으로 요약된다. 예를 들면 “헤어짐 앞에서”의 애잔한 분위기는 긍정적 수용의 정서로 바뀐다. 특히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스코틀랜드 민요 “Auld Lang Syne”로 끝을 낸 것은 이별이 새로운 시작 또한 의미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멀리 떠나간 친구”또한 완전한 이별이 아닌 언젠가는 만나리라 믿는 “떨어짐”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때로는 무너질 수 있는 법”도 왼손과 오른 손의 긴장 어린 진행이 추락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하지만 마지막의 라틴 스타일로 강렬한 마감이 새로운 희망의 여지를 남긴다.
한편 만남을 주제로 한 “우연”과 어린 시절을 향하는“초면” 같은 곡은 새로운 사건과 순수했던 때의 추억이 삶을 행복하게 한다고 이야기 한다. 담백한 코드 진행을 바탕으로 밝고 멜로디가 이어지면서 맑은 수채화 같은 세상을 그리게 한다. 나아가 “상상과 현실 속의 만남”은 3박자의 리듬과 극적인 멜로디가 상상과 현실의 차이를 느끼게 하면서도 그 만남이 결국엔 낭만적인 것으로 귀결됨을 생각하게 해준다.
끝으로 “영원”, “I Care About You”, “나의 가족을 생각해”는 지키고 싶은 것, 소중한 것에 대한 사랑,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라는 따스한 바람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피아노를 통해 드러낸 민경인은 삶을 긍정하고 기대하는 사람이다. 실제 그가 이처럼 밝고 평온한 사람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래도 장르를 초월해 많은 연주자와 보컬들이 그와 함께 하기를 원했으니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적어도 그는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려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다.
한편 나는 이 앨범의 매력이 한 피아노 연주자의 속내를 담고 있다는 것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그는 독백하듯 조용히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나아가 다시 새로운 활동의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지극히 개인적인 음악은 감상자로서의 나를 편안하게 한다. 그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나 또한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해, 당신의 근심을 이해하고 당신의 행복에 기뻐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앨범 타이틀이 “The Things You May Feel In MYDaily Life”가 아니라 “The Things You May Feel In YOUR Daily Life”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결국 한 연주자의 좋은 기운이 감상자에게까지 옮겨지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앨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