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실비 쿠르부와지에는 클래식적인 맛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긴장을 즐기는 연주자이다. 그러면서도 작곡에도 많은 공을 들인다. 개인적으로 2003년에 선보였던 앨범 <Abaton>이 그녀의 음악적 성향을 가장 잘 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실비 쿠르부와지에는 이탈리아 와인 “Terre d’Agala”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인 바이올린 연주자 마크 펠드만과 함께 한 앨범 <Music for Violin and Piano>(1999)에서는 이를 제목으로 한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앨범에서는 와인이 아닌 “Agala”의 의미에만 집중해야 할 듯하다. 앨범 타이틀의 “Agala”는 산스크리트어로 선조, 선배, 전임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Terre d’Agala는 선조의 땅을 의미한다.) 이에 맞게 앨범에 수록된 9곡은 모두 그녀가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인물을 향하고 있다. 그 대상은 그녀에게 피아노 연주를 가르쳤던 아버지 앙투완 쿠르부와지에부터 오넷 콜맨, 제리 알렌, 존 애버크롬비, 이렌 슈바이처 등의 연주자부터 홀로 코스트 생존자로 여성 인권 운동에 앞장섰던 시몬느 베일, 조작가 마틴 퍼이어와 루이즈 부르주아에 이른다.
그녀에게 영향을 준 인물을 생각한 연주이기 때문인지 그녀의 연주는 긴장 가득한 흐름 속에서도 대상의 그림자를 언뜻 드러낸다. 그래서 그것을 그녀의 현재와 비교하게 한다. 그것은 또한 그녀가 이들 연주자와 정치인, 조각가의 어떤 부분에서 영감, 영향을 받았는지 확인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이번 앨범을 듣는 가장 큰 재미가 아닌가 싶다.
이를 테면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Imprint Double”같은 곡의 리듬은 그녀의 아버지가 즐겨 연주했다는 부기우기 스타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넷 콜맨을 향한 “Éclats for Ornette”에서는 전반적으로 아방가르드 재즈의 개척자를 그리게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뒤뚱거리는 스윙감은 더욱 더 특별한 그림자로 다가온다. 또한 이렌 슈바이처를 향한 “Fly Whisk”는 동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아방가르드 피아노 연주자를 향한 곡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다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연주-아주 짧은 동기에 바탕을 둔-가 실비 쿠르부와지에인 동시에 이렌 슈바이처를 생각하게 한다.
반면 제리 알렌을 대상으로 한 타이틀 곡은 선배 피아노 연주자의 특정 스타일을 그렸다기 보다는 동시대에 존재했었고 나아가 함께 연주할 정도로 인연도 있었던 그녀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비감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더 집중했다는 인상을 준다. 이것은 역시 최근 세상을 떠난 기타 연주자 존 애버크롬비를 향한 “South Side Rules”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된다. 영향이란 것이 스타일 외에 다른 부분에서도 얻을 수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정신이나 태도의 측면에서 연주를 진행한 것은 시몬느 베일을 향한 “Simone”도 포함된다.
한편 “Pierino Porcospino”는 “찰리”를 향한 곡이라 하는데 그 챨리가 누군지 명확하지 않다. 내 경우 음악을 듣기 전에는 제리 알렌, 존 애버크롬비처럼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찰리 헤이든을 생각했다. 그러나 오넷 콜맨과 함께 했을 때에 국한한다면 모를까 실제 음악은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찰리 파커? 글쎄 모르겠다. 어쩌면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찰리를 향한 것일 수도 있겠다. (반대로 그녀만 알고 있는 찰리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곡 제목이 독일의 정신과 의사 하인리히 호프만의 근대 동화책 <더벅머리 페터>에서 가져온 것이고 다른 어느 곡보다 트리오가 밀착되어 촘촘한 걸음을 걷는 연주가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찰리 채플린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든다.
앨범에서 가장 특별하게 생각된 곡은 두 조각가를 향한 곡이다. 그 중 마틴 퍼이어를 대상으로 한 “Circumbent”는 조각가의 “The Tripodic Circumbent”라는 수레 위에 나무를 쌓아 만든 조형물을 그리고 있다. 피아노 연주자는 구조적인 성향의 조형물이 의미하는 추상적인 면을 복잡 정치한 연주로 표현했다. 루이즈 부르주아를 향한 “Bourgeois’s Spider”도 마찬가지. 이 또한 작가의 초대형 작품 “거미”를 주제로 했다. 여기서 피아노 연주자는 조형적인 면과 추상적인 면 모두를 피아노 연주와 트리오 연주로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한편 이번 앨범은 2014년 <Double Windsor>에 이은 그녀의 두 번째 피아노 트리오 앨범이다. 멤버 또한 드류 그레스(베이스), 케니 월센(드럼)로 같다. 이 트리오는 음악 특성상 전통적인 피아노 트리오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긴 한다. 하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그 가운데 같은 지향점을 향해 리듬과 솔로의 역할을 나눈 상태에서 나아가는 연주는 전통적 트리오와 궤가 같다. 그래도 선배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는 피아노 연주자의 의도에 맞추어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는 베이스와 드럼 연주자들의 존재감은 평범한 트리오 이상의 존재감을 발한다. 특히 자유로우면서도 틀을 유지하는 측면은 이번 앨범의 음악적 성과에 큰 역할을 했다.
사실 헌정의 성격을 지닌 연주는 무수하다. 하지만 그런 중에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연주는 많지 않다. 여기에 영향이 육화(肉化)되어 전체를 아우르는 덩어리로서의 결과물을 내놓은 경우는 더 드물다. 그런데 실비 쿠르부아지에는 이를 해냈다. 그것도 그녀가 추구하는 연주적 자유를 놓지 않은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