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자렛은 현존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이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훌륭한 연주자들이 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음악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대중들의 폭 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연주자를 말한다면 그가 제일 먼저 언급될 것이다. 즉, 음악과 인기 모두에서 성공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4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어느덧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쉽게도 활동 영역을 줄여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의 모든 연주와 앨범들은 역사를 넘어 전설이 되고 있다.
절대 음감을 지닌 음악 신동
1945년 5월 8일, 미국 펜실바니아주(州) 앨런타운에서 5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절대 음감을 보였다. 그래서 세 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 작곡도 시작했다. 그 결과 7세 무렵에는 자작곡을 포함한 작은 공연을 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그가 받은 음악 교육은 모두 클래식 음악 쪽이었다. 그런 중 고교 시절 재즈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파리에서 유명 클래식 작곡가이자 교육자였던 나디아 불랑제에게 작곡을 배울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고교 졸업 후 보스톤에 위치한 버클리 음대에 진학했다. 그렇다고 버클리 음대에서 학업을 계속하지도 않았다. 1년 과정을 수료한 후 과감히 전문 재즈 연주자의 꿈을 품고 뉴욕으로 향했다. 그 때가 1964년이었다.
사이드 맨 시절
뉴욕에 도착한 후 키스 자렛은 빌리지 뱅가드 클럽의 월요일 잼 세션 연주에 참여했다. 그런 중 1965년 드럼 연주자 아트 블래키가 그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드럼 연주자는 경력이 일천한 피아노 연주자를 단번에 자신의 밴드 재즈 메신저스의 멤버로 결정했다.
재즈 메신저스의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활동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무렵 재즈 메신저스는 하락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연주자의 이동이 많았고 그만큼 음악의 편차도 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키스 자렛 또한 그룹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 1966년 1월 캘리포니아 허모사 비치에 위치한 라이트하우스 클럽 공연을 담은 앨범 <Buttercorn Lady>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재즈 메신저스의 활동은 짧았지만 다른 연주자들에게 전문 연주자로서의 그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드럼 연주자 잭 드조넷이 그 중 한 명이었다. 키스 자렛의 연주를 들은 드럼 연주자는 당시 자신의 쿼텟을 결성하기 위해 연주자를 찾고 있던 색소폰 연주자 찰스 로이드에게 피아노 연주자를 추천했다.
1968년까지 약 3년간 몸담았던 찰스 로이드 쿼텟의 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사실 당시 재즈의 인기는 하락세에 있었다. 대중들은 재즈가 아닌 록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 중 쿼텟의 음악은 아방가르드 재즈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쿼텟은 록 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미국은 물론 유럽 그리고 당시 공산주의의 중심 국가였던 소련에서 공연을 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명반으로 남아 있는 앨범 <Forest Flower>를 비롯한 8장의 앨범들은 음악과 상업적인 측면 모두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찰스 로이드 쿼텟의 인기는 키스 자렛에게 독자적인 활동의 기회를 제공했다. 찰스 로이드 쿼텟의 앨범을 제작하던 아틀란틱 레이블에서 그의 리더 앨범을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쿼텟 활동과 별개로 키스 자렛은 베이스 연주자 찰리 헤이든, 드럼 연주자 폴 모시앙과 트리오를 이루어 <Life Between the Exit Signs>(1967), <Somewhere Before> 등의 앨범을 녹음하고 혼자서 피아노는 물론 오르간, 색소폰, 기타, 베이스 드럼 그리고 노래까지 한 포크 록 성향의 앨범 <Restoration Ruin>을 녹음했다. 이들 앨범에서 그는 60년대 후반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면서도 거침 없는 솔로 연주, 다양한 스타일을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상상력 등 자신의 음악적 핵심을 드러냈다.
키스 자렛은 찰리 헤이든, 폴 모시앙과의 트리오 연주에 만족했다. 그러나 그를 탐내는 또 다른 연주자가 나타났다. 바로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였다. 비밥 시대 이후 쿨 재즈, 모달 재즈 등 재즈사의 흐름을 좌지우지해온 이 트럼펫 연주자는 당시 록과 재즈를 결합한 퓨전 재즈 시대를 막 선언한 상태였다. 트럼펫 연주자는 이미 자신의 밴드에 이미 칙 코리아, 허비 행콕 등이 건반을 연주하고 있음에도 키스 자렛의 합류를 제안했다. 그러나 키스 자렛은 자신의 트리오 활동을 이유로 거절했다.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의 수 차례에 걸친 설득을 뿌리치지 못하고 1971년 밴드에 합류해 약 2년간 일렉트릭 피아노와 오르간을 연주했다. 이 시기의 연주는 <Live/Evil>, <Get Up With It>, <Miles Davis at Fillmore> 등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에 남아 있다.
아메리칸 쿼텟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서 활동하는 중에도 키스 자렛은 자신만의 음악을 하겠다는 열망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기존의 트리오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1971년에는 색소폰 연주자 듀이 레드맨을 합류시켜 쿼텟으로 확장했다.
흔히 아메리칸 쿼텟이라 불리는 이 쿼텟은 아방가르드 재즈를 바탕으로 가스펠, 동양이나 아프리카 음악 등을 혼합한 독창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이를 위해 각 연주자들은 자신의 주 악기 외에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다. 키스 자렛만 해도 피아노나 오르간 외에 색소폰과 스틸 드럼, 콩가 등의 타악기를 연주했다. 찰리 헤이든, 폴 모시앙, 듀이 레드맨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필요에 따라 샘 브라운(기타), 애어토 모레이라(타악기) 등의 연주자들를 참여시켜 더욱 정교하고 두터운 사운드를 연출하곤 했다.
아메리칸 쿼텟은 1976년까지 지속되었다. 6년간 그룹은 1971년 <The Mourning Of A Star>, <El Juicio (The Judgement)>, <Birth> 등의 앨범을 녹음한 것을 시작으로 1976년에 녹음된 <TheSurvivors’ Suite>, <Bop-Be>, 그리고 2014년 뒤늦게 발매된 <Hamburg 74>에 이르기까지 여러 앨범을 남겼다. 이들 앨범은 아틀란틱, 콜럼비아, 임펄스, ECM 등 여러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다.
ECM과의 인연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 자신의 트리오와 쿼텟 활동으로 바쁜 와중에 ECM 레이블의 제작자 맨프레드 아이허가 키스 자렛의 앨범을 제작하고 싶다며 연락을 했다. 독일 뮌헨에 위치한 ECM은 1969년에 설립되어 이제 10장 가량의 앨범을 발매한 신생 레이블이었다. 하지만 말 왈드론, 폴 블레이, 마리온 브라운, 칙 코리아, 데이브 홀랜드 등 키스 자렛 만큼이나 뛰어난 미국 연주자들의 앨범을 제작하며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맨프레드 아이허가 제작하겠다는 앨범은 트리오 앨범이었다. 그것도 찰리 헤이든, 폴 모시앙으로 구성된 당시의 키스 자렛 트리오가 아닌 게리 피콕(베이스), 잭 드조넷(드럼)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트리오 앨범이었다. 하지만 트리오 연주를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키스 자렛은 제작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솔로 앨범을 녹음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1971년 11월 10일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의 노르웨이 오슬로 공연 후 남는 시간을 이용해 솔로 앨범 <Facing You>가 녹음되었다.
머리 속에 있던 약간의 스케치만을 바탕으로 한 즉흥 연주로 이루어진 앨범은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었다. 그렇게 키스 자렛과 ECM의 긴 동반 관계가 시작되었다.
솔로 콘서트
맨프레드 아이허는 키스 자렛이 자신이 하고픈 음악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신뢰와 환경을 제공했다. 나아가 그에게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권유하기도 했다. 즉흥 솔로 콘서트가 그랬다. 1972년 맨프레드 아이허는 키스 자렛에게 독일 하이델베르그에서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에 홀로 무대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 이를 수락한 키스 자렛은 특별한 계획 없이 무대에 올라 생각나는 대로 긴 연주를 펼쳤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솔로 콘서트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한 맨프레드 아이허는 계속 공연을 기획했다. 그리고 1973년 스위스 로잔과 독일 브레멘에서의 솔로 콘서트를 담은 앨범 <Solo Concerts: Bremen/Lausanne>을 발매했다. 특별한 준비 없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재즈의 어법은 물론 클래식, 가스펠, 블루스 등 다양한 음악 요소를 가로지르며 펼치는 연주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그렇다고 싫어했다는 것이 아니다. 당시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연주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낯섦은 1975년 1월 24일 독일 쾰른에서의 솔로 연주를 담은 앨범 <Köln Concert>로 완벽히 해소되었다. 이 공연에서 키스 자렛은 순간적 직관에 의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펼쳤다. 미리 작곡한 것을 연주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연주였다.
앨범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키스 자렛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솔로 콘서트를 펼쳤다. 그리고 그 공연들은 <Sun Bear Concerts><Paris Concert>, <Vienna Concert>, <La Scala>, <Tokyo Concert>, <Radiance>, <The Carnegie Hall Concert>, <Testament>, <Rio>, <Creation> 등의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그런 과정 속에 즉흥 솔로 콘서트는 키스 자렛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유러피안 쿼텟
솔로 콘서트를 이어가면서도 키스 자렛은 부단히 새로운 편성,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시도했다. 1974년 새로운 쿼텟의 결성이 그 중 하나였다. 색소폰 연주자 얀 가바렉, 베이스 연주자 팔레 다니엘손, 드럼 연주자 욘 크리스텐센으로 이루어진 이 쿼텟은 아메리칸 쿼텟과 구별하기 위해 멤버 구성에 착안해 유러피안 쿼텟으로 불리곤 한다. 게다가 결성 당시에도 아메리칸 쿼텟은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새로운 쿼텟은 <Belonging>을 시작으로 <My Song>, <Personal Mountains>, <Nude Ants> 그리고 2012년에 뒤늦게 발매된 <Sleeper> 등의 앨범을 남겼다.
아메리칸 쿼텟이 다소 원초적이고 서사적인 성향의 연주를 펼쳤다면 유러피안 쿼텟의 연주는 상대적으로 재즈의 전통적인 어법을 바탕으로 유럽의 서정적인 부분을 적절히 반영한 연주를 펼쳤다. 또한 작곡의 비중이 컸다. 국내에서도 꾸준한 사랑을 얻고 있는 앨범 <My Song>이 대표적이었다.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클래식 연주
솔로 콘서트, 쿼텟 활동 외에 키스 자렛은 보통의 재즈 연주자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 시도들은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끊임 없이 새로운 음악이 솟아나는 듯 바쁘게 앨범들을 녹음해 나갔다. 그 결과 독일 오토베렌의 베네딕트 수도원의 바로크 오르간을 연주한 앨범 <Hymns/Spheers>(1976), 오버더빙 기술을 이용해 홀로 다양한 악기를 연주한 앨범 <Invocations/The Moth and the Flame>(1979), <Spirits>(1986), 중세의 건반악기 클라비코드를 연주한 앨범 <Blook Of Ways>(1986),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위해 쓴 곡을 담은 앨범 <Luminessence>(1974), <Arbour Zena>(1975), <The Celestial Hawk>(1983), 클래식 연주자들과 함께 한 앨범 <Bridge Of Light>(1993) 등 장르와 상관 없이 오로지 자신의 창작 욕구와 연주 욕구만을 따른 앨범들이 만들어졌다.
한편 그의 독창적인 시도 중에는 자유로운 재즈만큼이나 악보에 충실한 클래식적인 색채를 지닌 것이 많았다. 그런 중 맨프레드 아이허는 ‘뉴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클래식 앨범 제작을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와 함께 에스토니아 출신의 클래식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의 곡을 담은 앨범 <Tabula Rasa>를 제작하며 기돈 크레머의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할 피아노 연주자로 키스 자렛을 선택했다. 이를 계기로 키스 자렛은 바흐, 헨델, 모차르트, 쇼스타코비치 등의 클래식 작곡가들의 실내악이나 콘체르토 곡들을 연주한 앨범을 하나씩 녹음해 나갔다.
스탠더드 트리오
1983년 솔로 콘서트 활동, 클래식 앨범 녹음,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거듭하여 바쁜 중에 키스 자렛은 새로운 트리오 활동을 시작했다. 맨프레드 아이허가 1971년에 제안했던 게리 피콕, 잭 드조넷이 함께 한 트리오였다. 그가 새로이 트리오를 결성한 것은 많은 연주자들이 자신만의 것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스탠더드 곡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스탠더드 곡이 여전히 연주자의 개성을 살리는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1983년 1월 미국 뉴욕의 파워스테이션 스튜디오에서 트리오는 현장에서 연주할 곡을 정해가며 11곡을 녹음했다. 이미 세 연주자는 1977년 게리 피콕의 앨범 <Tales Of Another>에서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연주자간의 호흡에는 큰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실제 연주는 그보다 훨씬 훌륭했다. 그리고 즐거웠다. 이에 트리오는 별도로 즉흥 연주 곡 세곡을 녹음했다. 이 기록은 <Standards vol. 1>, <Standards vol. 2>, <Changes> 이렇게 석 장의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트리오의 출발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평단과 대중 모두 전통적이면서도 전혀 진부하지 않은 트리오의 연주에 환호했다. 키스 자렛이 생각했던 대로 익숙하고 오래된 언어로 신선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음에 감탄했다. 이에 힘 입어 트리오는 2015년까지 활동을 지속하며 수 많은 공연과 최근에 뒤늦게 발매된 앨범 <After The Fall>을 비롯한 20여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투병과 복귀
키스 자렛은 1970년대부터 끊임 없이 연주하고 끊임 없이 앨범을 녹음했다. 예를 들면 2주 사이에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네 개 도시에서 다른 편성, 다른 성격의 앨범 넉 장을 녹음하는 등 여러 명의 연주자와 작곡가가 힘을 모아도 함께 하기 힘든 일정을 소화했다. 이 모두 건강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50대에 접어들면서 피아노 연주자에게 만성피로증후군이 찾아왔다. 특별한 이유 없이 피로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병이었다. 해결책은 휴식이었다. 그 결과 1996년 8일간 이탈리아 4개 도시를 돌며 가졌던 솔로 콘서트-2016년 앨범 <Multitude of Angels>로 발매되었다-를 끝으로 그는 과감히 활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2년 후 이번에 발매된 앨범 <After The Fall>에 담긴 1998년 11월 미국 뉴저지의 뉴어크에서의 트리오 공연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집에서 피아노를 연습하듯 차분하게 연주한 곡들로 채운 솔로 앨범 <The Melody At Night With You>를 시작으로 앨범 활동도 시작했다.
복귀 후 그는 트리오와 솔로 콘서트 연주로 활동 범위를 다소 축소했다. 그리고 솔로 콘서트 연주를 긴 시간 끊임 없이 연주를 이어가는 대신 여러 개의 작은 단위의 즉흥 연주를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래도 음악적 감동은 여전했다. 2002년 일본 오사카와 도쿄 공연을 담은 <Radiance>를 시작으로 <Testament-Paris/London>, <Rio>, <Creations> 등의 앨범에 담긴 키스 자렛의 솔로 콘서트 연주는 여전히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가득했다. 여기에 연륜에 따른 깊이까지 느껴졌다.
트리오 연주 또한 휴식 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많은 공연과 <Inside Out>, <My Foolish Heart>, <Somewhere> 등의 앨범을 통해 세 연주자는 하나의 자아에 속한 신체 기관이기라도 한 듯 완벽한 호흡을 보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프리 재즈 이상의 자유로운 연주를 펼쳤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피할 수 없는 법. 80대에 접어든 게리 피콕이 건강상 세계 곳곳을 다니며 공연하기 어려워지면서 트리오는 2015년 아쉽게도 활동을 멈추었다. 그 결과 현재 키스 자렛은 솔로 콘서트 활동만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키스 자렛의 삶을 거칠게 정리해 보았다. 매우 다방면으로 자신의 음악을 전개시켰기에 단순히 시대 순으로 그의 삶을 정리하기 어려웠다.
키스 자렛의 삶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끊임 없이 하나의 스타일이 자신에게 달라 붙는 것을 거부해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를 자유롭게 했다. 열정에만 의지해 모든 것을 불사르기엔 어려운 70대 중반이 된 지금에도 이것은 유효하다. 그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는 계속 될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상관 없다. 지금까지 그가 해온 음악만으로도 그는 세상에 충분한 감동을 주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직 수많은 녹음이 미공개로 남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