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출신의 여성 보컬 노마 윈스톤은 1970년대부터 꾸준한 활동을 해왔다. 그 가운데 2000년대 들어 글라우코 베니에(피아노), 클라우스 게싱(색소폰, 클라리넷)과 트리오를 이루어 만든 앨범들은 정말 대단했다. 수채화 같은 사운드와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시정(詩情)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약 4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새 앨범에서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특히나 이번 앨범은 영화 음악을 노래하고 있어 한층 더 흥미를 자극한다. 그런데 미셀 르그랑, 니노 로타, 엔니오 모리코네, 루이스 바칼로프, 버나드 헤어만 등 유명 영화 음악 작곡가들의 곡을 노래했음에도 보통의 영화 음악을 노래한 보컬 앨범들과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것은 잘 알려진 영화 주제곡이 아니라 그녀가 개인적으로 좋아한 영화의 음악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노먼 주이슨 감독의 1968년도 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말레나>,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자기만의 인생>,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 빔 벤더스 감독의 <리스본 스토리> 등을 비롯한 11편의 영화의 음악이 선택되었다.
이들 영화 음악을 노래하면서 그녀는 6곡의 가사를 자신이 새로 썼다. 그리고 “Lisbon Story”, ” Meryton Townhall”에서는 스캣으로만 노래했다. 나아가 두 차례 연주된 :Vivre Sa Vie” 같은 곡에서는 노래 없이 동료의 연주만으로 녹음했다.
한편 그녀와 함께한 연주자들도 앨범에 담긴 아련함을 실내악적인 울림으로 잘 풀어냈다. 특히 이번 앨범에는 기존 두 연주자 외에 헬게 노바키안의 타악기와 마리오 브루넬로의 첼로가 필요에 따라 가세해 정서적인 깊이를 더했다.
앨범의 내용을 보면 그녀가 단순히 영화의 인상적인 멜로디를 노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감정, 감성을 담으려 했음을 생각하게 된다. 재즈 연주자들이 원곡에서 멀리 떨어진 방향에서 곡을 연주하듯이 그녀 또한 텍스트 이전에 자신을 중심에 두고 음악적 상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무시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번 앨범을 영화 음악 송북(Song Book)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겠다.
원곡을 반영하고 자신의 감성을 투영한 그녀의 노래는 이번 앨범에서도 시적인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 시성은 이번 앨범의 경우 아련함으로 가득하다. 또한 그 아련함은 단지 영화를 보던 날의 추억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기 어려운, 그보다는 삶의 여러 일들을 겪은 70대 후반의 한 여성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이라 할 정도로 깊이가 깊다. 그래서 때로 그녀의 노래는 슬프기까지 하다.
사실 나는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아련한 슬픔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평소의 맑고 청아한 음색이 이제는 갈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을 먼저 느꼈다. 헬렌 메릴 같은 스모키한 분위기로 변한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아. 이제는 그녀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이 앨범이 몇 해전 세상을 떠난 존 테일러와 케니 휠러를 향한 것이었음을 알고 나서 앨범에 담긴 회한이 이해가 되었다. (앨범 타이틀은 우리 말로 “잠들다” 정도로 해석된다.) 언급한 피아노 연주자, 트럼펫 연주자와 그녀는 트리오 아지무스로 활동했었다. 모든 것이 찬란했던 젊은 시절이었다. 그리고 존 테일러는 한 때 그녀의 남편이기도 했다. 이런 친밀한 두 사람을 향한 노래인데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은 영화 <헨리 5세>의 주제 음악인 “Touch Her Soft Lips And Part”에서 유난히 잘 느껴진다. 이 곡에서 그녀는 “언덕 끝에서 그가 떠나는 것을 보면서 그녀의 하늘에 더 이상의 태양은 없고, 마음에는 더 이상의 기쁨이 없다”고 노래한다. 슬픈 풍경이다.
물론 아직도 이번 앨범에 담긴 그녀의 노쇠한 목소리에 대한 의심은 여전하다. 그것은 다음 앨범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이 듦으로 인한 변화가 사실이라면 나는 슬플 것이다. 그녀가 존 테일러와 케니 휠러를 향해 아련함을 비쳤던 것처럼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향해 아쉬움을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