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 제임스 설터 (박상미 역, 마음산책 2010)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James Salter)의 단편 소설집 <어젯밤>을 2015년에 이어 재독하다. 2015년에 읽었을 때는 소설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10편의 단편이 보이는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웠다오히려 이후에 읽은 소설이 난해해서가 아니었다그 무렵 내 마음이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10편 중 몇 편은 읽었던 기억이 났지만 대부분 처음 읽는 것처럼 낯설었다그것이 오히려 나았다부분 기억 상실처럼 희미하게 일부가 떠오르는 소설을 읽는 것은 김빠진 맥주를 마시는 것 같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번에 읽고 나서 짧은 10편의 소설이 지닌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아울러 처음 읽었을 때 어지러움을 느꼈던 것은 비단 내 산만함 때문만은 아님을 깨달았다작가의 글쓰기가 축약과 비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특히 단편임에도 멀리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글쓰기는 충분히 독자의 혼란을 가져올 여지가 있다예를 들면알링턴 국립묘지의 경우 뉴웰이 주인공이면서도 중간에 웨스터벨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가 흐른다그래서 잠시 중심이 흔들리고 이 때 독자의 어지럼이 발생한다.

물론 읽으며 천천히 이야기를 정리하면 서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사실 이것이 작가의 단편을 읽는 재미 중 하나일 수도 있다건너 뛰고 축약된 이야기를 다시 조립하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들 앞에서는 허망함당황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10편의 소설들을 통해서 작가는 사랑이 떠나는 순간 혹은 지나간 뒤 남는 미련슬픔허무함의 정서를 그려냈다그것도 방향 지시등을 켜지 않고 훅 들어오는 내 앞차 같은 식의 결말로 말이다표제작 “어젯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의 소설을 대변하지 않나 싶다.

그 집뿐이었다나머지는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삶을 꼭 닮은 장황한 소설 같았다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어느 날 아침 돌연 끝나버리는핏자국을 남기고.”

한편 사랑의 멀어지게 된 것에는 주인공들이 헛된 열정욕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혜성에 나오는 문장처럼 말이다.

하루는 버그도프 백화점 앞을 지나는데 쇼윈도에 맘에 드는 초록색 코트가 걸려 있었어요그래서 들어가서 그 코트를 샀어요그런데 며칠 지나서 다른 곳에서 처음 코트보다 더 좋은 걸 본 거예요그래서 그것도 샀어요나중에 옷장 안엔 초록색 코트가 네 벌이나 걸려 있게 됐죠욕망을 자제할 수 없어 그런 거예요.”

오로지 욕망에만 충실했던 사랑이었기에 그것은 시간이 흐른 뒤 후회로 남거나 현재의 건조함에 영향을 끼친다그래서 각 단편의 뒷맛은 슬픔과 갈증을 유발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욕망에만 충실하면 후회만 남으니 그러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보지는 않는다오히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 때가 가장 살아 있는 느낌을 받곤 한다그래서 나는 우리 가까이에 삶의 방향을 바꾸는 욕망 덩어리의 사건이 있음을그래서 우리 또한 그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음을 작가가 말하려 했다고 생각한다실제 단편 중 몇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한편으로 단편들 속 사랑들이 후회로 남는 것은 욕망에만 충실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나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그 때의 사랑보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랑이 덜 뜨거워서가 아니다그 지난 사랑에 내 존재의 일부가 담겨 있기에 그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그래서 플라자 호텔의 주인공은 지난 사랑을 재회해도 다시 그 감정이 타오르지 않는다그것은 “Last Night”의 일이었으니 말이다어제인 동시에 마지막이었던 밤.

PS: 이 책의 표지는 미국 화가 던컨 한나의 그림이다. 얼핏 보면 에드워드 호퍼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그림은 고독의 기운을 담고 있다. 그것이 소설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마음산책에서 출간한 작가의 소설들은 모두 던컨 한나의 그림을 표지로 하고 있다. 그래서 수집욕을 자극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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