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매력으로 자신의 음악을 정리하다.
다이아나 크롤은 현재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재즈 보컬이다. 1993년 첫 앨범 <Stepping Out>을 시작으로 그녀는 24년간 총 13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그 앨범들은 모두 대중적으로 음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8장의 앨범이 발매와 함께 빌보드 재즈 앨범 차트 정상에 오른 것, 다섯 개의 그래미 상을 비롯한 여러 상도 수상했다. 요즈음 새로운 신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그녀의 명성은 여전히 공고하다.
그녀가 대중적으로, 음악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관능과 순수를 오가는 부드러운 질감의 스모키 보이스, 블루스와 팝을 오가는 감칠맛 나는 피아노 연주, 빅 밴드 스윙, 보사노바 등 다양한 스타일, 편성을 넘나드는 포용력 등이 앨범마다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음악적 자세가 그녀만의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실제 그녀에 견줄만한 음악을 들려준 보컬은 많다. 그럼에도 많은 감상자들이 ‘다이아나 크롤’을 먼저 선택하게 된 것은 재즈 본연의 맛을 어려움 없이 전달하는 한편 그 전통적인 스타일 속에 현재의 감상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바로 지금”의 정서를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익숙함과 새로움을 적절히 섞을 줄 알았다고 할까?
그런데 최근 5년 사이에 다이아나 크롤이 선보였던 두 장의 앨범, <Glad Rag Doll>(2012)과 <Wallflower>(2015) 다른 차원에서 새로움을 넘어서 낯선 느낌이 강했다. 2012년도 앨범에서는 춤, 연기, 노래가 어우러진 1920년대 보드빌 쇼의 음악을 재현하면서 평소와는 다른 질감의 음악을 들려주었고, 2015년도 앨범에서는 청춘 시절 라디오를 들으며 따라 불렀던 팝과 록의 명곡을 주제로 하면서 팝적인 색채가 강한 음악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물론 두 장의 앨범 모두 그녀의 추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그만큼 보컬로서 그녀의 매력이 잘 녹아 들었기에 낯설어도 감상에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다. 실제 이 두 장의 앨범 또한 이전 앨범들처럼 감상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감상자들은 이들 앨범을 들으며 그녀의 과거를 넘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아련함을 느꼈다.
하지만 스탠더드 곡을 전통적인 스타일로 노래하고 보사노바를 가벼이 노래하던 이전과는 분명 다르다는 느낌을 주었다. 나 또한 두 장의 앨범에 만족하면서도 그녀가 다시 재즈의 한 가운데로 돌아오기를 바랬다.
이런 바람을 그녀가 알았던 것일까? 이번 앨범에서 다이아나 크롤은 이 시대 최고의 재즈 보컬에 걸맞은, 재즈의 가장 낭만적인 면을 담은 음악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혹시라도 그녀의 음악을 꾸준히 들어온 감상자들이 느꼈을 그리움을 일시에 해소하려는 듯 그녀와 함께 했던 연주자들을 대거 불러 세 개의 다른 편성을 이루어 연주하고 노래했다.
세 개의 편성은 그녀 자신이 연주한 피아노에 크리스티안 맥브라이드의 베이스, 러셀 말론의 기타가 트리오, 존 클레이튼 주니어의 베이스, 제프 해밀튼의 드럼, 앤서니 윌슨의 기타로 구성된 쿼텟, 토니 가니에의 베이스, 카리엠 리긴스의 드럼, 마크 리봇의 기타, 스튜어트 던컨의 피들(바이올린)이 가세한 퀸텟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스테폰 해리스의 비브라폰이나 알란 브로드벤트가 편곡하고 이끄는 스트링 오케스트라가 곡에 따라 등장한다.
이러한 편성은 그녀의 이전 앨범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냇 킹 콜 트리오의 편성을 가져온 피아노-기타-베이스 트리오의 경우 그녀의 세계적인 인기의 시작을 알린 1996년도 앨범 <All for You: A Dedication to the Nat King Cole Trio>과 1997년도 앨범 <Love Scenes>에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Love Scenes>에서는 이번 앨범의 트리오 멤버들이 함께 했었다.
다른 콤보 편성의 연주는 <When I Look In Your Eyes>(1999), <The Look Of Love>(2001) 등의 앨범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다만 바이올린과 함께 한 것은 처음이다. 또한 스트링 오케스트라는 <The Look Of Love>, <Quiet Nights>(2009) 등에서 만날 수 있었다.
여러 편성을 한 장의 앨범에 모은 백화점식 구성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When I Look In Your Eyes>에서 이러한 구성을 보여주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때는 그녀가 지닌 음악적 가능성, 다양한 편성에도 변하지 않는 그녀의 매혹적인 면을 확인시켜주는 의미가 강했다. 즉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음악을 보여준 것이었다. 반면 이번 앨범은 지금까지 그녀가 들려준 음악을 새로이 정리했다는 의미가 강하다. 또 다른 차원의 베스트 앨범이라고 할까?
그래서 앨범은 이전 다이아나 크롤의 연주와 노래에서 느낄 수 있었던 편안하고 낭만적인 노래와 연주로 가득하다. 보고 싶었던 친구를 만난 듯한 친근함을 준다. 그렇다고 진부하지도 않다. 새로운 스탠더드 곡들을 노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녀의 변하지 않은 매력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변할 필요가 없다. 완벽한 아름다움은 질리지 않기 때문이다.
앨범의 두 번째 곡 “Isn’t It Romantic”이 대표적이다. 쿼텟에 영롱한 비브라폰과 부드러운 바람 같은 스트링 오케스트라가 가세한 이 곡에서 그녀의 노래는 그녀의 목소리가 지닌 가장 매혹적인 면을 드러낸다. 특히 앤서니 윌슨의 기타 인트로에 이어 나지막이 “Isn’t It Romantic?”하고 노래를 시작하는 부분은 앨범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Isn’t It Romantic”은 노래 가사를 넘어 다이아나 크롤이 감상자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내 노래) 참 낭만적이죠?”라고 말이다. 곡 중간에 흐르는 그녀의 피아노 솔로나 기타 솔로 또한 이 곡이 후에 그녀의 대표 곡의 하나로 기억될 것임을 확신하게 한다.
이러한 낭만성은 냇 킹 콜의 노래로도 잘 알려진 “L-O-V-E”, 보사노바 리듬을 부드럽게 유영하는 “Night & Day”, 보통 빠른 곡으로 알려진 것을 느리게 노래해 우수를 담아낸 “Sway” 등의 곡으로 이어진다. 모두 쿼텟 편성-필요에 따라 스트링 오케스트라가 가세한-으로 연주된 곡들이다.
피아노, 베이스, 기타 트리오 편성도 쿼텟에 버금갈만한 매력을 발산한다.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Like Someone In Love”가 대표적이다. 크리스티안 맥브라이드의 탄력 넘치는 베이스 인트로로 시작하는 이 곡은 넉넉한 베이스, 가벼이 흔들리는 기타, 그리고 포근한 다이아나 크롤의 보컬이 어울려 재즈가 지닌 가장 여유로운 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Blue Skies”도 넘실대는 베이스의 경쾌한 리듬 감을 바탕으로 손가락 하나를 까닥거리게 하는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Dream”도 마찬가지. 트리오에 스트링 오케스트라까지 가세한 이 곡은 곡 제목처럼 꿈결같은 안락함을 느끼게 해준다. 일체의 불안과 근심을 잊게 해주는 한 없이 달콤한 분위기로 감상자를 이끈다.
퀸텟 연주는 연주자가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인 분위기는 쿼텟 연주와 유사하다. 다만 바이올린이 가세해 낭만적인 맛이 더 강해졌을 뿐이다.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한 “I’ll See You In My Dreams”가 대표적이다. 바이올린이 부드럽게 흐르고 마크 리보의 스윙감 넘치는 솔로가 인상적인 이 곡은 편성과 리듬에 있어 스테판 그라펠리의 바이올린과 쟝고 라인하르트의 기타가 한 없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던 집시 재즈를 느끼게 한다. “I’m Confessin’ (That I Love You)”도 마찬가지다. 담백한 리듬 섹션이 주는 산뜻한 스윙감에 바이올린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져 사랑스러운 시간을 그리게 한다.
세 개의 편성을 오가고 있지만 낭만적인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에 앨범은 어지러운 느낌을 주지 않는다. 감상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여기에는 세 개의 편성 모두 보컬을 중심에 둔 편곡의 힘이 컸다. 편곡은 스트링 오케스트라의 편곡을 알란 브로드벤트에게 맞긴 반면 기본적인 편곡은 다이아나 크롤이 직접 했다. 그런데 그녀는 역할상 겹칠 수 있는 피아노와 기타를 적절히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편곡했다. 기타가 전면에 나서면 피아노는 숨을 죽이고 피아노가 전면에 나서면 기타가 가벼운 리듬 연주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 식으로 편곡한 것인데 그 결과 트리오이건 쿼텟이건 아니면 퀸텟이건 모든 편성은 담백하며 보컬의 매력이 잘 드러난다. 각 악기가 조화로이 어울린 연주를 하나로 묶고 이에 보컬이 대응하게 한 것이다. (여기에는 알 슈미트의 믹싱도 한 몫 했다.)
그러면서도 다이아나 크롤은 노래 외에 피아노 연주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매력을 뽐낸다. “No Moon At All”에서의 블루지한 솔로 연주가 대표적이다. 그동안 노래에 치중하면서 상대적으로 덜 드러났던 피아노 연주력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앨범을 소개하며 나는 이번 앨범이 근래 발표했던 두 장의 앨범 <Glad Rag Doll>, <Wallflower>과 단절된 것처럼 이야기했다. 음악적으로 보면 그런 부분이 분명 강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앨범 또한 지난 두 장의 앨범처럼 추억이 주제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Wallflower>를 들으며 나는 앨범이 그녀의 70년대부터 90년대의 시간을 담고 있는 만큼 더 이상 추억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과거라 할 수 있는 시간을 다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앨범을 그 이후의 시간, 그러니까 재즈 피아노 연주자이자 보컬로서 삶을 시작한 시기에 대한 회상의 차원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래된 동료 연주자들을 부르고 이전에 했던 여러 편성들을 시도한 것이 아닐까? 20여년전 재즈의 정상을 향해 신선한 발걸음을 내딛던 달콤한 시절을 그리며 노래하고 연주했기에 그 어느 앨범보다 매혹적이고 달콤한 앨범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조용하디 조용한 밤, 앨범을 다시 듣는다. 침묵 사이로 흐르는 다이아나 크롤의 노래와 연주가 달콤하다. 아름답다. 부디 당신도 공감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