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정리하고 그 이상을 듣게 해주는 앨범
셰이퍼 음악원에는 교외 경연에 주로 참가하는, 그래서 교내의 우수한 학생들로 이루어진 빅 밴드가 있다. 스튜디오 밴드라 불리는 이 밴드를 지휘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테렌스 플레쳐(J.K 시몬스 분). 그런데 그는 매우 가혹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정확한 박자감을 가르치기 위해 학생의 뺨을 때리는가 하면, 의자를 던지며 부모, 인종 등에 관련된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일부러 학생을 다른 학생과 비교하고 저 평가 하여 무리한 경쟁심을 부추기기도 한다. 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학생들이 많다. 졸업 후까지 이를 극복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제자도 있다.
제자가 목숨을 끊은 것에 애도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는 자신의 교육 방식을 후회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최고만 남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식의 교육 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한계를 뛰어넘어야 최고의 연주자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영어에서 가장 해로운 말은 “잘 했어(Good Job)”라고 말하기 까지 한다. (영화 제목이 우리 말로 “채찍”을 의미함을 생각하자.)
이런 그의 눈에 신입생 앤드류 네이먼(마일스 텔러 분)이 눈에 띈다. 그는 교내의 평범한 빅 밴드 나소 밴드에서 보조 드럼 연주자로 활동하던 앤드류를 스튜디오 밴드의 드럼 연주자 중 한 명으로 발탁하고 그에게 온갖 모욕과 폭력을 가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드럼 연주자로 만들려 한다.
그런데 또 신입생 드럼 연주자 또한 성격이 만만치 않다. 스윙 시대에 등장해 오랜 시간 활동하며 명연을 남긴 버디 리치를 우상으로 삼은 이 젊은 드럼 연주자는 플레쳐의 가혹한 지도방식을 견디며 실력을 연마한다. 먼저 사귀자고 했던 여자 친구마저 버릴 정도이다.
선생의 교육 방식이 제대로 먹혔던 것일까? 실력이 향상될수록 선생에 대한 제자의 투쟁심 또한 높아진다. 그래서 결국 둘이 부딪히는 상황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상은 데미언 채즐 감독의 2014년도 영화 <위플래쉬(Whiplash)>의 전반적인 내용이다. 어쩌면 두 주요 인물의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실제 영화가 큰 장면 전환 없이 두 인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되기에 주요 내용-결말은 생략한-이라 해도 무관하다. 실제 영화는 약간의 실외 장면을 제외하고는 단조로운 연습실 장면이 거의 주를 이룬다.
그럼에도 영화는 액션 영화를 보는 것 이상의 긴장과 박력을 느끼게 한다. 두 인물의 긴장감은 마치 피 튀기는 총격전이나 칼 싸움을 보는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J.K 시몬스가 남우 조연상을 수상하고 음향상, 편집상을 수상하는 등 영화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흥행 또한 좋았다. 한국만 해도 150만 이상의 관객이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의 음악은 저스틴 허위츠가 담당했다. 그는 장면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설명하기 위한 곡들을 적재 적소에 잘 배치했다. 그리고 앤드류의 개인 연습이나 밴드의 합주 등 음악이 주된 역할을 하는 장면과 구분되게 했다. 즉, 영화 속 현실의 음악과 영화 밖의 음악이 겹치지 않도록 했다.
아예 작곡가는 나소 밴드, 스튜디오 밴드의 연습 곡 등 영화 속 현실에 관련된 음악은 다른 작,편곡가에게 의뢰했다. 이에 팀 시모넥이 나소 밴드의 연습 곡을 비롯해 스튜디오 밴드의 경연 참가곡으로 사용된 “Too Hip To Retire”, 카네기 홀 공연에서 연주되는 “Upswingin'” 등의 곡을 썼다. 아울러 전투 장면보다 더한 압박감을 주는 대미의 장면에 연주된 후안 티졸의 “Caravan”은 존 와슨이 편곡했다. 이들의 작,편곡은 모두 주인공이 연주하는 드럼이 돋보이도록 했다.
그런데 이 사운드트랙 앨범은 흥미롭게도 단순히 영화에 등장한 음악을 순서대로 싣지 않고 “I Want To Be One Of The Great”, “If You Want The Part, Earn It”, “He Was A Beautiful Player” 이렇게 세 부분으로 음악을 새로이 정리해 실었다. 이것은 영화의 열린 결말과 관계가 있지 않나 싶다. 데미언 채즐 감독은 앤드류와 플레쳐의 사제관계를 넘은 적대적 관계를 어느 한 방향으로 해결하지 않고 관객에게 이를 위임한 채 영화를 끝냈다. 그래서 관객마다 어느 한쪽의 입장에서 생각하거나 아니면 두 사람 모두를 객관적 입장에서 생각하여 각자의 결론을 내곤 한다. 그래서 이를 반영해 앤드류, 플레쳐를 중심으로 곡들을 새로이 정리한 것이 아닐까?
아무튼 세 부분 가장 짜릿하게 와 닿는 부분은 아무래도 “I Want To Be One Of The Great”일 것이다. 영화의 시작을 이 부분에는 앤드류의 연습 장면에 사용된 “Snare Liftoff”를 시작으로 첩보 영화의 주제음악으로도 어울릴법한 박진감 넘치는 “Overture”, 그와 유사한 느낌을 주는 펑키한 감각의 “Whiplash”, 그리고 영화의 백미이자 이 앨범의 백미인 “Caravan” 등이 포함되었다. 모두 여러 연주자들로 구성된 브라스 섹션에 맞춰 그 이상의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드럼 연주를 만나게 해준다.
한편 학교에서 해고당한 플레쳐가 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때 나오는 “Fletcher’s Song In Club”은 박진감 넘치는 곡들 사이에서 달콤함을 선사한다. 아울러 폭군 선생의 이면을 보게 해준다. 영화에서 이 곡은 J.K 시몬스가 직접 연주했다고 한다. (드럼 연주 장면 또한 마일스 텔러가 직접 하기는 했지만 실제 소리는 다른 연주자의 것이다. 자세히 보면 소리와 동작에 차이가 있다.)
“If You Want The Part, Earn It”은 앤드류와 플레쳐가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플레쳐의 요구대로 더블 타임-보통의 리듬을 두 배로 빨리 연주하는 것-으로 연주하는 장면의 “What’s Your Name”, 손에 피가 나도록 연습하는 장면을 위한 “Practicing” 등 최고가 되기 위한 앤드류의 노력, 그와 함께 변해가는 모습을 설명하는 장면에 사용된 음악들로 구성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두 번째 부분은 앤드류의 연습 연주 외에 상황, 분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저스틴 허위츠의 곡이 포함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곡은 아무래도 두 시간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연 장소로 가기 위해 차를 급하게 운전하던 앤드류 대형 트럭과 충돌하는 장면에 사용된 “Accident”같은 곡이 아닌가 싶다. 이 곡은 경연 장소에 늦을까 마음이 급한 앤드류의 마음을 드럼 연주를 중심으로 표현했다. 킥 드럼, 스네어 드럼, 탐탐 등이 시간이 긴박한 상황을 느끼게 하는 한편 시종일관 촘촘히 이어지는 심벌 연주가 앤드류의 불안한 심리적 상태를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사고 후 이어지는 리듬이 사라진 사운드는 모든 것이 그대로 끝날 지도 모른다는 상황을 대비적으로 느끼게 한다. 이것은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음악으로 상상할 수 있다. 사고가 나기 전의 불안한 상황, 사고 후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 감각을 음악 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사고에도 불구하고 다시 앤드류가 피를 흘리며 일어나 갈 길을 가는 장면까지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이외에 “Drum & Drone”, “Dismissed” 등의 곡들이 서사의 진행을 상상하게 해준다. 그래서 이 두 번째 부분은 영화를 본 감상자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마지막 “He Was A Beautiful Player”는 플레쳐의 교육관을 드러내는 장면을 위한 곡들로 구성되었다. 서로 학교에서 퇴학 당하고 해직 당한 두 사람이 한 클럽에서 우연히 만나서 한 대화를 그대로 담은 “Good Job”, 그 장면에 배경으로 흐르던 스탄 겟츠의 “Intoit”, 그 다음에 이어진 “No Two Words”, 카네기 홀 공연에서 플레쳐가 앤드류에게 복수하기 위해 예고 없이 추가한 “Upswingin'”, 세상을 떠난 졸업생인 션 캐시를 애도하며 그의 트럼펫 연주를 학생들에게 들려주던 장면에 사용된 “Casey’s Song” 등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찰 했다는 소리에 만족하지 않고 늘 한계를 마주해야 한다는, 이를 위해 그토록 가혹하게 학생들을 몰아세웠다는 플레쳐의 생각을 반영한 장면에 사용된 곡들이 포함되었다. 한편 “When I Wake”는 앤드류가 첫 데이트를 할 때 피자 집에서 흐르던 음악으로 성격상 플레쳐의 가혹한 생각과 대조를 이루는 장면의 곡이지만 음악적으로는 앞선 “No Two Words”와 잘 어울린다.
한편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이 앨범은 단순한 사운드트랙 이상의 재미를 준다. 몇몇 곡이 영화 속에서 앤드류나 플레쳐가 도달하고 싶었던 이상적인 음악을 확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타이틀 곡 “Whiplash”같은 곡은 영화 속에서는 제대로 완성된 연주로 나오지 않았다. 플레쳐가 자신이 생각한 템포로 연주되지 않는다며 계속 연주를 멈추고 독설을 뿜는 연습 장면에 미완성의 형태로 나올 뿐이다. 그리고 경연 장면에서도 이 곡은 완주되지 못했다. 한편 “Upswingin'”은 플레쳐가 앤드류에게 복수하기 위해 준비했던 곡이다. 그래서 앤드류는 처음 본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운드트랙에는 그 실수를 모두 제거한 연주가 실린 것이다. 그래서 영화와는 또 다른 재미, 플레쳐가 생각했던 연주가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한편 앤드류와 플레쳐가 클럽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흐르던 스탄 겟츠의 “Intoit”이나 저스틴 허위츠가 쓴 향수 가득한 “No Two Words” 등의 곡은 실제 영화에서는 두 인물의 대화에 가려져 어떤 곡인지 모를 정도로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운드트랙 앨범에서는 이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잘 들리지 않는 부분까지 음악에 세심한 신경을 썼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나는 영화의 열린 결말과 관계가 있건 없건 영화 음악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영화에서 미처 들려주지 못했던 음악을 이상적인 형태로 들을 수 해주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이로 인해 영화와 별개로 앨범 자체를 보다 음악적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그대로 옮긴 사운드트랙 앨범들, 삽입곡보다 장면을 설명하는 곡들 중심의 앨범들은 종종 타이틀 곡 한 두 곡을 제외하고 감상을 이어가기 어렵게 한다. 특히 영화를 보지 못한 감상자들은 음악에 공감하기 어렵다. 마치 지하철에서 전화통화를 하는 사람의 혼잣말 같은 대화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 앨범의 경우 중간에 장면을 설명하는 짧은 곡들이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곡 자체의 흐름 별로 새로이 정리되어 있기에 훨씬 더 감상이 용이하다. 게다가 영화를 본 사람들도 궁금해 했을 연주, 들리지 않았던 곡까지 잘 정리했으니 영화와는 도 다른 만족을 얻지 않을까?
아..위와 동감이에요..영화를 좋게 보고나서 후에 들어본 사운드트랙은 별 생각없이 들었었는데
글을 너무 잘 쓰셔서 이 글을 본 후에 언제 듣건 새롭게 들릴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다시 들으셨을 때 만족스럽기를 바랍니다. ㅎ
글을 읽고 나니,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남았던 여운이 아직도 느껴집니다. 음악이 음악 그 자체로 들리지 않고, 음악에 대한 제 인식의 한계를 극단으로 몰고가게 한 영화로 기억됩니다. 영화음악이 그런 인식의 변화 과정을 통해 느낌이나 감동이 변형되긴 하지만, 특히 연주 과정과 결과에 대해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영화였던 걸로 기억되네요.
여전히 ‘영화와 별개로 앨범을 즐길만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그러니까…심리적 저항감이 남아 있는 저로서는 뭔가 인식의 전환이 될것 같은 포스팅입니다. 포스팅 글 그대로 한번따라 가보면서 들어봐야 겠어요.
심리적 저항감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영화적으로 보면 사실 이 영화는 재즈를 상당히 오해한 영화입니다. 그래서 저는 음악보다 영화에 심리적 저항감이 있네요. 확실히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죠?ㅎ
심리적 저항감이란게.. 거의 폭주하는 연주에 몸은 전율하게 되는데 제 의식은 ‘전율하고 싶지 않음’입니다.
연주만 놓고 보면 마음놓고 감동받을 것 같은데, 그 광기어린 과정이 그대로 펼쳐지는 것을 보니..’헉…이건.. 감동받고 싶지 않아.’^^ 이런 저항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심리적으로 선생한테 완전히 포섭된 것으로 보이는 점도 저에겐 거부감이 들었고요. 나중엔 그 경계도 뚜렷하지 않았지만요. 결론은 영화내용에 압도당해서 연주가 연주 자체로 들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맞겠네요.
아직 겁나서 듣지 못했지만 ㅋ 영화랑 별개의 앨범이다 생각하고 한번 시도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