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자로(Al Jarreau 1940.03.12 ~ 2017.02.12)

부드러운 목소리로 행복을 노래했던 보컬 하늘로 오르다

aj

2월 12일 일요일 오전 9시경, 알 자로가 세상을 떠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월 13일 현재까지 그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2주 전에 과로로 인해 LA의 병원에 입원을 했었고 치료 중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아 과로로 인한 합병증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1940년 3월 12일 생으로 우리 나이로는 78세-미국 나이로는 76세-이니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그럼에도 최근 몇 년간 연이어 발생한 재즈 명인들의 부고(訃告)처럼 알 자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또한 매우 뜻밖의 일이었다. 사실 그는 2월 10일 금요일 건강상의 이유로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더 이상 공연을 하지 않겠다는 소식을 세상에 알렸다. 이 때만 해도 나는 그의 은퇴가 아쉽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있다, 그도 쉬어야 한다는 생각에 담담히 그 소식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후 내용을 종합해 보니 상황이 급박했던 것 같다. 일단 2월 말에 그는 일리노이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갈수록 좋지 않아 이 공연을 취소하는 것이 이어져 2017년에 예정된 모든 공연의 취소 나아가 공연 은퇴로 이어진 듯하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그가 일리노이 공연만 취소했더라면, 아니 적어도 2017년 공연 일정만 취소했다면 그렇게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일은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실제 그는 2010년에도 프랑스에서의 공연 일정을 소화하던 중 호흡기 문제와 부정맥으로 인해 갑작스레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며 2012년에는 폐렴으로 인해 프랑스에서의 공연 몇 개를 취소했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건강을 회복해 공연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건강 상태가 2010년이나 2012년에 비해 훨씬 좋지 않았기에 공연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은퇴”라는 명목으로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음을 선언하는 순간, 근 50년간 이어진 그의 음악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그는 강한 상실감에 빠졌을 것이다. 어쩌면 인생의 끝에 왔다는 느낌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급격히 건강이 쇠약해져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아닐까?

 

알 자로는 보컬 중의 보컬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악기처럼 사용할 줄 알았다. 특히 그의 스캣 창법은 루이 암스트롱이나 엘라 핏제랄드 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기교를 드러내기 위한 스캣이 아니라 흥에 겨워 저절로 나오는 자연발화적 연주 같았다. 게다가 그는 음색의 미묘한 조절을 통해 곡에 다채로운 색을 부여할 줄 알았다. 여러 명의 보컬이 노래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강약 조절은 물론 음역대마다 목소리의 두께, 발성, 호흡 등에 미묘한 변화를 주어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느낌을 곡에 부여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전혀 어지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만의 색이 강했던 보컬이었던 만큼 그는 장르를 구분하지 않았다. 재즈, 팝, R&B 등 어떤 스타일이건 그의 노래는 자연스러웠고 남들과 다른 그만의 개성으로 빛났다. 팝 역사상 그만이 유일하게 그래미상 재즈, 팝, R&B 부분에서 최우수 보컬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이를 말한다. 먼저 <Look To The Rainbow>(1977), <All Fly Home>(1978), <Breakin’ Away>(1981) 등의 앨범으로 1978년, 1979년, 1982년 세 번에 걸쳐 최우수 재즈 보컬 상을 수상한데 이어 1982년에는 역시 앨범 <Breakin’ Away>로 최우수 팝 보컬상을, 1993년에는 앨범 <Heaven & Earth>(1992)로 최우수 R&B 보컬 상을, 그리고 2007년에는 <God Bless The Child>(2006)로 최우수 전통 R&B 보컬상을 수상했다.

그에 걸맞게 히트 곡도 여럿이다. 빌보드 차트 15위에 올랐던  “We’re In Love This Together”(1981)를 비롯해 “Breakin’ Away”(1982), “Mornin’”(1983), “After All”(1984), “Moonlighting”(1987) 등 빌보드 차트 1위 곡은 없지만 수에 있어서는 어느 팝 보컬 부럽지 않은 수의 히트곡을 남겼다.

반대로 50여년의 활동 기간에 비해 앨범 수는 많지 않다. 1975년에 발매된 첫 앨범 <We Got By>를 시작으로 마지막 앨범이 된 2014년도 앨범 <My Old Friend>에 이르기까지 정규 앨범과 라이브 앨범 모두 합쳐 20여장 밖에 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공연을 즐겼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관객과 호흡하며 흥에 겨워 노래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노래는 종교적 소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목사이자 보컬이었던 아버지와 피아노 연주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음악적 환경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심리학과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직업 재활학을 공부했다. 정신적 신체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었던 모양이다. 실제 졸업 후 그는 직업 재활 상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다만 재즈와 노래에 대한 열망을 지울 수 없었기에 일과 후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하는 것을 거쳐 전문 보컬의 삶을 살게 되었을 뿐이다.

어쩌면 노래를 통해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돕기로 결심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모든 노래에 편재하는 행복의 정서가 이를 말한다. 일체의 근심과 불안은 애초부터 없다는 듯 그의 노래는 늘 미소로 가득했다. 슬픔으로 슬픔을 달래는 방법도 효과적이기는 하지만 행복한 노래로 슬픔을 지우는 것을 선택한 듯 했다. 어쩌면 마음이 힘든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불이 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느낌을 줄 법도 한데 신비롭게도 그의 노래는 그렇지 않았다. 연하고 촉촉한 5월의 연둣빛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른 그의 노래는 언제나 즐거운 삶의 약속을 그리게 했다.

실제 그의 홈페이지에는 그가 음악보다 먼저 “정서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을 비롯해 여러 이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으며 “노래는 이를 위한 그의 도구”였다는 것으로 그를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긍정과 행복을 담아 노래했기에 그가 오랜 시간 팝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세상을 떠났어도 노래는 남았다. 그로서는 한 순간의 노래였을지 모르나 앞으로도 계속 행복의 기운을 발산할 것이다. 내 남은 삶을 너머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즐거워하고 감탄해 하다가 그토록 뛰어난 보컬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타까워하는 일 또한 반복될 것이다. 행복의 순간에 깨닫는 부재의 고통! 어쩌면 그의 사망은 우리 삶을 행복하게 만들던 한 요소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평생을 노래했던 그의 사망을 진심으로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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