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한 전설의 밴드 한국을 찾다
*칙 코리아 일렉트릭 밴드의 내한 공연 전에 쓴 글이다. 바쁨을 핑계로 공연 후에 글을 올린다. 그래도 밴드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칙 코리아가 다시 한국을 찾는다. 3월 8일 수요일 저녁 8시 LG 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어쩌면 이 소식에 심드렁한 사람들이 많을 지 모르겠다.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 비교적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아온 연주자이기 때문이다. 재즈의 명인인 것은 맞지만 연주자를 직접 만나는 호기심은 줄었다고 할까? 하지만 이 피아노 연주자는 늘 새로운 편성과 스타일로 한국을 찾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80년대 커다란 인기를 얻었던 일렉트릭 밴드를 재결성해 무대에 설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에릭 마리엔탈(색소폰), 프랭크 겜베일(기타), 존 패티투치(베이스), 데이브 웨클(드럼)으로 이루어진 클래식 멤버들과 함께 말이다. 이들은 현재 각각 자신의 악기에서 최고의 연주자로 인정받으며 솔로와 리더로서의 활동을 활발히 해오고 있는 연주자들이다. 그런 연주자들이 칙 코리아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으니 아무리 칙 코리아가 낮이 익다고 해도 어찌 다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현재에도 유효한 완벽한 사운드
칙 코리아가 일렉트릭 밴드의 멤버들을 다시 부르게 된 것은 자신의 75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나이와 상관 없이 늘 넘치는 영감으로 혈기왕성한 활동을 해온 칙 코리아이지만 75세 생일은 유난히 특별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다른 연주자들 또한 밴드 멤버들이 다시 모여 연주하기를 계속 바래왔던 모양이다. 각자 독자적인 활동으로 바쁜 중이었지만 다시 모여 연주하는데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다섯 연주자가 생각했던 오랜만의 만남은 단지 칙 코리아의 75세 생일 축하만을 위한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모인 추억의 멤버들은 지난 해 8월 17일부터 1주일간 LA의 카탈리나 재즈 클럽에서 공연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세계 투어를 이어갔다. 이번 서울 공연도 그 일환이다. 이후에는 일본 도쿄와 홍콩에서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공연 소식을 듣고 나는 1986년에 발매된 첫 앨범 <The Chick Corea Elektric Band>부터 2004년 일시적으로 모여 만들었던 앨범 <To The Stars>까지 일렉트릭 밴드가 발표한 앨범 7장을 다시 들어보았다. 정작 앨범을 들으면서 나는 멀리는 30년 전에 만들어진 음악이지만 그것이 현재에도 유효한, 어쩌면 영원할 매력을 지니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실제 다채로운 건반 악기를 오가며 마법 같은 소리를 만들어 내는 칙 코리아를 비롯해 열정적이면서도 지나치게 흥분하지는 않는 에릭 마리엔탈, 앞뒤를 오가며 사운드의 밀도를 높이는 프랭크 겜베일, 넘치는 힘으로 전체 사운드에 탄성을 부여하는 존 패티투치,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기계처럼 정확한 리듬을 구사하는 데이브 웨클의 연주는 지금도 놀라운 것이었다.
게다가 다섯 연주자가 만들어 낸,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단단하게 응집된 사운드 또한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실 화려한 실력파 연주자들이 모였음에도 극한의 연주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꺼져버린 슈퍼 밴드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일렉트릭 밴드는 개인의 탁월한 연주력이 모였을 때 그 합을 넘어서는 음악이 만들어짐을 보여주었다. 공간을 빈틈 없이 채우는 그들의 연주는 이내 우주적인 상상력을 자극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를 느끼게 하면서도 어쩌면 평행우주의 하나로 존재할 법한 미래적인 도시를 상상하게 했다.
1986년 그 시작을 알리다
칙 코리아는 하드 밥 시대에 등장한 이후 마치 자아가 여럿인 양 아방가르드 재즈, 퓨전 재즈, 클래식 등을 가로지르며 실로 다채로운 활동을 해왔다. 그래도 그가 1968년 마일스 데이비스의 그룹에 합류해 건반 연주자로 퓨전 재즈의 탄생에 일조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후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 웨더 리포트 등과 함께 퓨전 재즈를 대표하는 그룹으로 기억되는 리턴 투 포에버를 결성해 큰 인기를 얻었음을 생각하면 퓨전 재즈는 그의 음악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시대의 감수성을 따른 면이 있었다고는 해도 퓨전 재즈 혹은 전기적 혹은 전자적 질감의 음악을 한 때의 음악으로 버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 정규 밴드가 아니어도 그는 최근까지 꾸준히 그에 해당하는 음악을 지속적으로 선보여왔다. 2013년에 발표했던 <The Vigil>이 그 최근의 예이다.
1977년 <Musicmagic>를 끝으로 리턴 투 포에버가 와해된 이후에도 칙 코리아는 아방가르드 재즈, 자유즉흥 솔로 연주, 스트링 섹션과의 협연, 프리드리히 굴다 같은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와의 듀오 연주 등 음악적 외연을 넓히는 중에도 <Secret Agent>(1978), <Tap Step>(1980), <Touchstone>(1982), <Again And Again>(1983) 등의 퓨전 재즈 성향의 앨범을 꾸준히 발표했다.
하지만 퓨전 재즈에는 록 그룹처럼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음악을 발전시켜나가는 워킹 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결국 1986년 당시 퓨전 재즈 전문 레이블로 부상한 GRP 레이블과 계약하면서 칙 코리아는 존 패티투치, 데이브 웨클 등과 함께 일렉트릭 밴드를 결성하고 앨범 <Chick Corea’s Elektric Band>를 녹음하게 되었다.
이 첫 앨범에서 칙 코리아는 펜더 로즈, 미니 무그, 신서사이저, 싱클라비에 등 당시의 모든 첨단 악기를 활용해 1인 이상이 연주하는 듯한 복합적인 연주로 70년대와는 다른 도시적인 질감의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존 패티투치, 데이브 웨클 등도 록에서 자양분을 얻은 전기, 전자적 연주로 힘을 보탰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룹의 역동적인 음악은 70년대 퓨전 재즈를 80년대의 도시적 감성에 맞춘 것이자, 동시에 부드러운 분위기를 우선하며 팝에 보다 경도되고 있던 당대의 퓨전 재즈에 70년대의 방식이 아직 유효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발전을 거듭했던 클래식 일렉트릭 밴드
그런데 첫 앨범은 엄밀히 말하면 칙 코리아와 존 패티투치, 데이브 웨클 등 20대 중반의 젊은 연주자 두 명으로 구성된 일렉트릭 트리오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들 외에 스캇 헨더슨, 카를로스 리오의 기타가 함께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수록 곡 가운데 절반에만 참여해 세션 연주자에 더 가까웠다.
칙 코리아 일렉트릭 밴드-이번 내한 공연을 하게 되는-의 진정한 완성은 1987년에 이루어졌다. 일렉트릭 밴드의 두 번째 앨범 <Light Years>를 녹음하면서 칙 코리아는 프랭크 겜베일(기타), 에릭 마리엔탈(색소폰) 등 30대 초반의 연주자를 합류시켰다. (세 곡에서는 카를로스 리오가 참여했다.)
새로운 멤버들과 칙 코리아는 “Time Track”, “Starlight”을 제외하고는 퀸텟이 아니라 듀엣, 트리오, 쿼텟 편성으로 연주자의 조합을 달리해가며 사운드의 밀도를 조절했다. 그 결과 전반적으로 첫 앨범에 비해 안정적으로 정돈된 듯한 사운드, 화려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연주가 부드럽게 흘러가는 사운드가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존 패티투치의 펑키한 베이스를 중심으로 모든 연주자가 펑키한 감각을 드러내는 앨범의 타이틀 곡은 80년대의 퓨전 재즈를 대표하는 곡의 하나라 할만한 것이었다. 한편 앨범은 이듬해 열린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R&B 연주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두 번째 앨범의 인기에 힘 입어 일렉트릭 밴드는 곧바로 세 번째 앨범 <Eye of the Beholder>를 발표했다. 1988년에 발매된 이 앨범에서 일렉트릭 밴드는 두 번째 앨범의 정돈된 사운드를 차분한 분위기로 확장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칙 코리아는 신디사이저, 키보드 외에 피아노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프랭크 겜베일도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는 등 일렉트릭적인 면을 줄인 결과였다.
이로 인해 앨범의 재즈적인 느낌은 한층 강화되었다. 특히 칙 코리아의 피아노 솔로와 에릭 마리엔탈의 색소폰 솔로는 당대의 포스트 밥 스타일의 연주에 비교할 만 했다. 또한 “Eternal Child”에서의 라틴적인 색채감은 알 디 메올라의 기타가 함께 하던 시절의 리턴 투 포에버를 떠올리게 했다.
세 번째 앨범의 성과는 네 번째 앨범 <Inside Out>으로 이어졌다. 이 앨범에서 다섯 연주자는 전작에 비해 일렉트릭적인 면을 조금 더 강화하기는 했지만 일렉트릭 사운드 자체가 주는 화려한 색채감보다는 굳건히 손을 잡고 정해진 방향으로 나아가는 연주, 그러면서 전통적인 재즈처럼 자신의 연주적 역량을 조화로이 드러내는 연주에 집중했다. 정확하게는 치밀한 연주를 통해 밴드가 추구하는 세련된 미래지행적인 사운드를 완성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4부작으로 이루어진 “Tale Of Daring”이 좋은 예이다. 이 곡의 거대하게 부푼 사운드는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섬세한 기교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마지막 앨범과 해체 그리고 이후
1991년에 발매된 다섯 번째 앨범 <Beneath The Mask>에서도 탄탄한 호흡과 멤버들의 솔로 연주로 이루어진 견고한 사운드는 여전했다. 그러면서도 전반적인 앨범의 분위기는 두 번째 앨범-다섯 연주자가 처음 완전체를 이루었던-과 유사했다. 사운드의 질감 또한 이전 두 장의 앨범에 비해 한층 더 일렉트릭했다. 그리고 분위기를 우선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중적인 면이 강했다. 당시 인기를 얻고 있던 GRP 레이블의 다른 퓨전 재즈 그룹이나 연주자들의 음악과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할까? 따라서 앨범은 전반적으로 매끈했지만 특별함은 덜 했다. 그래서였을까? 이 앨범을 끝으로 일렉트릭 밴드의 활동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칙 코리아는 일렉트릭 밴드를 버리지 않았다. 그룹이 와해된 후 곧바로 그는 기존 멤버인 에릭 마리엔탈과 함께 마이크 밀러(기타), 지미 얼(베이스), 게리 노박(드럼)을 불러 두 번째 일렉트릭 밴드를 결성했다. 그리고 1993년 앨범 <Paint The World>를 선보였다. 이 앨범 또한 전반적인 완성도는 좋았다. 하지만 첫 번째 일렉트릭 밴드를 뛰어넘는 무엇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시대는 어느덧 90년대였다. 70년대에 시작된 퓨전 재즈로서는 과거만큼의 호응을 얻기 어려운 시대였다.
그렇게 일렉트릭 밴드는 찬란한 과거가 되는 듯 했다. 칙 코리아 또한 포스트 밥 계열의 음악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2004년 사이언톨로지교의 신봉자인 그는 이 교의 창시자인 L. 론 허바드의 공상과학 소설 <To The Stars>를 읽고 음악적 영감을 받아 소설에 대한 일종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구상했다. 그리고 이 서사적 음악을 위해서는 일렉트릭 사운드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렉트릭 밴드의 옛 동료들을 다시 소환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앨범에서 다섯 연주자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절정의 연주력을 보여주었다. 아울러 오랜만의 만남임에도 마치 어제까지 함께 연주한 듯한 탄탄한 호흡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1991년 이후 13년만의 새 앨범은 일렉트릭 밴드를 좋아하고 그리워한 감상자들에게 선물과도 같았다. 하지만 선물은 계속되지 않는 법. 이후 멤버들은 각자의 활동에 주력했다. 그리고 다시 12년이 지난 2016년에 다시 모이게 된 것이다.
새로운 창조를 향한 재결합 공연
한편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들로 구성된 일렉트릭 밴드라 해도 새 앨범 없이 공연을 한다면 그냥 추억을 상기시키는 수준의 공연, 유명 연주자를 가까이서 보았다는 것 이상의 느낌을 주지 못하는 공연에 그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 수도 있겠다. 물론 과거의 그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것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느슨한 향수에 의지해 연주하는 것은 칙 코리아는 물론 나머지 네 연주자들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에 대해 칙 코리아는 일렉트릭 밴드의 공연은 오랜만의 만남을 넘어 새로운 창조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즉, 그땐 그랬지 하는 수준 이상의 연주, 현재에 유효한 음악을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나는 칙 코리아의 이 말을 믿는다. 그는 늘 도전을 택했다. 따라서 이번 일렉트릭 밴드의 공연 또한 과거의 완벽한 연주를 바탕으로 새로운 우주적 사운드를 들려줄 것이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앨범까지 녹음하게 되지 않을까? 실제 그의 앨범 이력상 이제 일렉트릭 사운드의 앨범을 하나 선보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