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연주자 엔리코 피에라눈지는 보통 빌 에반스의 피아니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 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클래식의 영향을 늘 느끼게 해주었다. (빌 에반스 또한 그런 면이 있었기는 하다.) 이런 중 최근 그는 클래식적 소양을 드러낸 앨범 두 장을 동시에 발매했다. 한 장은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브루노 카니노와 듀오로 아스토르 피아졸라, 애런 코플란드 등의 곡을 연주한 앨범 <Americas>이고 두 명의 프랑스 연주자 디에고 엥베르(베이스), 앙드레 세카렐리(드럼)과 트리오를 이루어 연주한 이 앨범이다.
이 앨범에서 피아노 연주자는 바흐, 드뷔시, 사티, 풀랑, 슈만 등의 클래식 곡을 연주한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클래식과 재즈의 만남이라는 형식적인 측면보다 재즈 자체에 있는 것 같다. “Mein Lieber Schumann”이나 “Liebestraum Pour Tous” 같은 곡처럼 클래식 곡을 바탕으로 그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자유로이 풀어 연주하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원곡을 잘 반영한 사티의 “1 ère Gymnopédie”같은 곡에서도 그는 원래 곡 안에 감추어졌던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재즈의 흔들림을 강조한다. 그리고 솔로 연주 또한 빌 에반스/엔리코 피에라눈지의 색을 더 많이 드러낸다. 결국 클래식곡을 연주했지만 이 앨범은 재즈 연주자-그것도 아름다움을 지닌-로서의 엔리코 피에라눈지를 재인(再認)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