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티그란 하마시안은 유년 시절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성장하면서-지금은 고향에서 살고 있다-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었는지 재즈 안에 아르메니아의 음악 전통을 결합시키려 적극적인 노력을 해왔다. ECM에서의 첫 앨범 <Luys I Luso>(2014)만 해도 아르메니아의 전통 종교 음악을 합창곡으로 바꾼 음악을 담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트럼펫 연주자 아르베 헨릭센을 비롯한 세 명의 노르웨이 연주자와 함께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매우 긴장을 느끼게 할만 했다.
하지만 ECM의 제작자 맨프레드 아이허의 음악적 상상력은 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왔다. 레이블의 초창기부터 여러 연주자의 만남을 주선했던 제작자는 2013년 가을 독일 라이브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피아노 연주자와 라이브 샘플링을 전문가 얀 방의 듀오 연주를 들었다. 노르웨이의 풍크트 페스티벌 실황의 일부였다. 이 짧은 실황에서 제작자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래서 연주자들과 상의 끝에 얀 방과 함께 활동했던 아르베 헨릭센과 아이빈트 아르셋을 불렀다.
그렇다면 네 연주자의 만남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티그란 하마시안은 이번 앨범에서도 아르메니아의 음악을 가져왔다.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했던 아르메니아의 사제이자 작곡가였던 코미타스의 5곡을 연주한 것이 이를 말한다. 참고로 코미타스는 아르메니아 민속 음악을 부활시킨 음악가로 평가 받는다. ECM에서만 해도 구르지에프 앙상블의 <Komitas>(2015), 안야 레흐너의 <Moderato Cantabile>(2014), 킴 카쉬카시안의 <Hayren>(2003) 등의 앨범에서 그의 음악을 만날 수 있다.
피아노 연주자는 코미타스의 곡들을 중심으로 조국의 분위기를 다시 한번 감상자들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향에 머무르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보다 시선을 멀리에 두고 미지의 세계로 과감한 여행을 시도했다. 아르메니아의 공기를 머금었지만 지도 상의 위치를 벗어난 새로운 가상의 공간으로의 여행을.
10곡의 “Traces”연작이 그렇다. 이들 곡에서 네 명의 연주자들은 자유로운 조합으로 긴장과 서정이 어우러진 연주를 들려준다. 이를 통해 아르메니아에서 출발해 더 먼 지점으로 나아간다. 아주 천천히 두 장의 CD에 걸쳐서. 그래서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Traces I”에서 시작해 두 번째 CD의 마지막에 위치한 “Angel Of Girona/Qeler Tsoler”에 이르는 동안 앨범은 서서히 변화를 거듭해 추상적인 공간에 안착한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코미타스의 곡들이 이 여행이 서아시아에서 출발했음을 상기시키지만 그 여행을 막지는 못한다.
이 여정에서 세 노르웨이 연주자들의 존재감이 빛난다. 먼저 트럼펫 연주자 아르베 헨릭센은 피아노 연주자의 성향을 잘 이해한 듯 아르메니아적인 분위기와 여기서 나아간 흔적의 세계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매우 아름답게 표현했다. 특히 경건한 슬픔과 아련한 동경을 머금은 코미타스 작곡의 “Tsirani Tsar”에서는 아르메니아 전통악기인 두둑와 유사한 사운드를 연출했다. 이것은 오버톤 주법을 사용한 건조한 질감의 연주로 우수를 담아낸 “Garun A”로 이어져 “Angel Of Girona/Qeler Tsoler”에 이르러서는 희미한 기억을 지닌 신비로운 연주로 귀결된다.
그래도 앨범의 추상적 공간감은 아이빈트 아르셋의 기타와 얀 방의 라이브 샘플링의 힘이 크다. 기타 연주자는 평소 선(線)보다는 면(面)의 느낌이 강한 연주를 즐겨왔다. 기타로 키보드의 패드 사운드 같은 효과를 낸다고 할까? 여기에 얀 방의 라이브 샘플링이 가세해 그 공간적 느낌을 강화한다. 라이브 샘플링은 그 자리에서 다른 연주자의 소리를 샘플링해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샘플링 전문가는 동료들의 연주에서 일부를 가져와 이를 정서적인 울림으로 만들어 낸다. 이러한 기타와 라이브 샘플링으로 인해 침묵의 공간은 진공이 아니라 솨~하는 소리를 내는 공기의 입자들로 가득한 생동의 공간이 된다. 볼 때마다 분위기가 달라지는 공간.
나는 티그란 하마시안이 아르메니아에서 벗어난 것이 마음에 든다. 북유럽 연주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가 조국의 음악적 전통을 바탕으로 음악 활동을 하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상상력은 그보다 더 큰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앨범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멈추지 않고 새로운 지점을 향하는 것이 재즈 연주자의 숙명이라면 이번 앨범이야 말로 그의 앨범들 가운데 가장 재즈적이다.
연말이라 크리스마스 느낌나는 보컬만 듣다가 이 앨범을 감상하니, 엄청 새롭게 느껴지네요..^^
음악에서 느껴지는 신비감이 에스닉함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는게 강점인 것 같습니다.
앨범구매하러 가야겠어요.ㅋ
에스닉과 클래식적인 감성 그리고 재즈적 어법이 어우러져 있죠. 그것들이 모여서 생경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앨범을 듣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좋은 감상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ㅎ
예^^ 고맙습니다. 낯선청춘님도 복 듬뿍 받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