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fore Midnight – 탁경주 (Windmill 2016)

편안하고 정겨운 트리오 연주 그 안에 담긴 낭만적 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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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을 좋아한다. 낮 동안 희미했던 내 정신은 어둠이 찾아오면서부터 맑아진다. 드라큘라나 뱀파이어라도 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밤이면 생기가 도는 것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 자신으로서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할까? 낮에는 회사에 소속된 최부장의 삶을 산다면 퇴근 후 저녁부터는 낯선 청춘 최규용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마저 잠든 늦은 밤이면 보다 더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기에 나는 밤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 밤 시간을 유예하기 위해 늦게까지 깨어 있는다.

그렇다고 그 밤에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TV의 스포츠 중계 시청, 음악 듣기, 글 쓰기 등이 주로 하는 일이다. 멍하니 일 없이 빈둥빈둥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그래도 그 시간이 나는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이번 앨범의 주인공인 기타 연주자 탁경주도 밤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긴 그 또한 좋아하는 일을 한다지만 재즈 기타 연주자란 타이틀로 사는 것이 때로는 피곤할 것이다. 사람이 사는 모습이란 대부분 거기서 거기가 아니던가? 그래서 그 또한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좋아하고 그래서 밤을 주제로 한 음악을 만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그의 세 번째 앨범에 담긴 밤의 이미지는 보통의 예상과는 자못 다르다. 대부분의 우리에게 있어 밤은 고요와 고독의 이미지가 강하지 않던가? 재즈로 표현한다면 마일스 데이비스의 차가운 뮤트 트럼펫이 낭만적인 “Round Midnight”같은 것이 아니던가? 적어도 내겐 그랬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공간, 어둠의 시간을 이상적인 이미지로 그려왔다.

하지만 탁경주의 음악은 그런 고요와 고독이 아닌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가벼운 수다가 있는 정겹고 따스함으로 가득한 밤을 지향한다. 앨범 타이틀 “Before Midnight”에서 알 수 있듯이 자정 무렵(Round Midnight)이 아니라 그 전의 시간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대략 8시부터 11시 무렵의 시간, 그러니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마음 맞는 친구, 사랑하는 사람과 낮 시간 동안 겪은 모험담을 나누며 술 한잔을 기울이다가 아쉬움 속에 내일을 위해 각자 집으로 향하는 그 무렵까지의 시간을 위한 음악이라 할 수 있겠다.

실제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Douce Ambience 부드러운 분위기”로 시작해 앨범 타이틀 곡, “Troublant Bossa” 등을 거쳐 “Blue Sand”로 끝나는 8곡은 정적인 느낌보다는 동적인 느낌이 더 강하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가라앉게 하지 않는다. 앨범에서 가장 조용한 곡이라 할 수 있는 타이틀 곡도 고독으로 침잠하게 하지 않는다. 찰리 파커의 복잡한 속주로 기억되고 있는 “Dexterity”나 슬픔을 머금은 멜로디를 지닌 “Dark Eyes”도 일체의 복잡함,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거리며 스윙감에 반응하게 만들며 낭만적 시간, 친구들과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내 경우는 지난 여름 몇 년 만에 만난 대학 동창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추억과 현재를 공유하던 날이 떠올랐다.) 나아가 내친김에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고픈 마음을 갖게 한다.

 

이러한 정겨운 밤을 그리기 위한 탁경주의 노력은 연주할 곡의 선정과 작곡에서부터 잘 느껴진다. 먼저 이번 앨범에서 그는 “Douce Ambiance”, “My Serenade”, “Are You In The Mood” 등 장고 라인하르트의 곡을 세곡이나 연주했다. 이러한 선택은 일견 지난 앨범 <Guitar Classics>에서 재즈 기타의 거장들의 곡을 연주하며 자신의 음악적 기원을 밝혔던 것의 연장으로 보인다. 알려졌다시피 장고 라인하르트는 뛰어난 기타 연주자인 동시에 집시 음악 스타일을 재즈에 접목한 집시 재즈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수 많은 후예 기타 연주자들이 그의 곡을 연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탁경주가 장고 라인하르트의 곡을 연주하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다른 기타 연주자들 대부분이 장고 라인하르트의 집시 재즈 스타일을 그대로 수용해 연주한 것과 달리 탁경주는 그렇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는 집시 재즈의 빠르고 단속적인 리듬을 뒤로 물리고 멜로디 본연의 아름다움, 리듬과 상관 없는 매력이 드러나는 연주를 펼쳤다. 실제 그는 집시 재즈보다는 곡 자체의 멜로디에 이끌려 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Douce Ambiance”는 정말 편안하고 부드러운 정서적 매력이, “My Serenade”는 거절할 수 없는 사랑의 고백에 대한 이미지가, “Are You In The Mood”는 달콤한 사랑에 빠진 자의 행복이 느껴진다.

앨범 수록 곡 가운데 장고 라인하르트의 곡은 세 곡에 지나지 않고 그마저 멜로디의 측면만을 강조해 연주했다지만 이 명인의 그림자는 다른 곡들에서도 드러난다. 제일 먼저 보통의 일렉트릭 기타가 아닌 나일론 스트링 일렉트릭 기타로 연주한 탁경주의 자작곡 세 곡 가운데 하나인 “Troublant Bossa”는 장고 라인하르트의 “Troublant Bolero”의 코드 진행을 바탕으로 그 위에 새로운 멜로디를 쓰고 다시 리듬을 보사노바로 바꾸어 만든 곡이다. 그 결과 모든 면에서 탁경주만의 새로운 곡이 되었지만 주의 깊게 들으면 저 멀리 장고 라인하르트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기타 연주자의 다른 두 자작곡, 어디선가 들었던 듯한 친근한 멜로디가 매력인 “Before Midnight”과 현재 기타 연주자가 거주하고 있는 부산의 청사포 해변을 생각하며 썼다는 “Blue Sand”도 스타일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에 있어서는 앨범의 전면에 배치된 장고 라인하르트의 곡들과 잘 어울린다. 이것은 러시아의 유명 민요에 바탕을 둔 곡으로 집시 재즈의 명곡이기도 한 “Dark Eyes”나 찰리 파커의 “Dexterity”에서도 유효하다.

 

자정 이전의 밤이 지닌 낭만적인 분위기를 그리기 위한 탁경주의 섬세함은 연주에서도 느껴진다. 장고 라인하르트의 곡에서 리듬을 대치하고, 찰리 파커의 곡을 보다 순화하고, 자작곡 또한 멜로디를 중심으로 정서적인 측면을 강조해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그는 연주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이 것이 이번 앨범의 가장 큰 미덕이라 생각한다.

이번 앨범에서 탁경주는 피아노 연주자 전용준, 베이스 연주자 신동하와 트리오를 이루었다. 지난 앨범이 기타-베이스-드럼의 가장 기본적인 기타 트리오 편성이었던 것과 달리 이번 앨범에서는 드럼 대신 피아노가 자리했다는 것이 매우 재미있게 다가온다. 피아노와 기타가 기능상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다가 드럼의 부재가 사운드에 허전함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색다른 트리오는 그 우려를 기우로 바꾸며 매우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움직임을 완성했다. 피아노와 기타는 우리의 걸음걸이가 왼발과 오른발의 교차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듯 깔끔한 공간 분할을 통해 괜한 덧칠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조화는 베이스가 중심이 된 리듬의 비어 있는 부분마저 메운다. “Dexterity”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이 곡에서 세 연주자의 움직임은 제목만큼이나 재치 있다. 동시에 자신들의 소리를 내면서도 서로 겹치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가 또렷하게 들리고 그것이 공간적 충만감을 준다. 개개인의 연주적 즐거움이 함께 하는 즐거움으로 승화된 모범적 경우라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자연인의 상태에서 친구와 함께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밤의 이미지에 연결된다.

한편 탁경주를 중심으로 한 세 연주자는 리듬, 화성 등을 소홀히 하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멜로디를 중심으로 연주를 펼친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모두 귀에 쏙 들어오는 친근한 매력을 지녔다. 과하게 출발점에서 벗어나려 하기 보다 분위기에 취해 흥얼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테마 멜로디에 이어 솔로를 펼치는데 그것이 참 달콤하고 상큼하다. 모두 탁월한 멜로디스트들이라 할만하다.

이처럼 멜로디를 중심으로 한 연주는 탁경주가 드럼을 배제한 트리오 편성을 선택한 이유를 깨닫게 한다. 트리오를 이상적인 편성으로 염두에 두고 리듬의 비중을 줄이고 멜로디의 비중을 늘리면서 그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드럼이 아닌 피아노를 선택했으리라.

 

지금까지 나는 탁경주의 이번 앨범이 밤 12시가 되기 전, 그러니까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기 전 마음 맞는 친구들 혹은 연인과 보내는 편안하고 정겨운 밤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앨범을 혼자 들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혼자라 외롭고 고독한 사람에게 이 앨범은 오히려 더 유효하다. 혼자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의 한 공간에 모여 원 테이크 방식으로 앨범을 녹음하는 세 연주자의 정겨운 어울림을 목도한다는 느낌이 마음을 따스하게 하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멜로디가 고독한 공간을 따스한 기운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10월 29일 밤 11시 55분, 지금 나는 조명마저 어둡게 한 채 홀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혼자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탁경주 트리오의 연주가 흐르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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