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곡들을 듀오만의 색채로 연주해 낸 매혹적인 앨범
연주자들이 음악적 영감을 얻는 방식은 다양하다. 혼자 생각에 잠기는 것에서부터 책이나 영화, 미술, 다른 장르의 음악, 여행 등에서 새로운 음악의 단초를 얻곤 한다. 여기에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다른 연주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상대의 음악을 들은 끝에 함께 연주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재즈 페스티벌에서도 종종 이루어진다. 자신의 연주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와 다른 연주자의 공연을 보고 그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 끝에 “한번 같이 해볼까?”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재즈 피아노 연주자 미셀 카밀로와 플라맹코 기타 연주자 토마티토의 만남도 그랬다. 두 연주자는 1984년 스페인의 마드리드 재즈 페스티벌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는 가벼운 관심에 지나지 않았다. 1990년 각기 다른 프로젝트로 스튜디오에서 지나쳤을 때도 두 사람이 함께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두 연주자의 음악 여정이 출발하게 된 것은 1998년 바르셀로나 재즈 페스티벌부터였다. 당시 페스티벌 프로그래머가 음악적 혜안이 있었던 듯 두 연주자의 공동 무대를 마련한 것이다. 무대에서 칙 코리아의 “Spain”과 콘수엘리토 벨라스케스의 “Besame Mucho” 이렇게 단 두 곡 밖에 연주하지 않았지만 두 연주자는 함께 하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깨달았다. 게다가 공연에 대한 관객의 반응도 매우 좋았다.
가능성을 확신한 두 연주자는 1999년 둘이서 처음 연주했던 칙 코리아의 곡을 타이틀로 한 첫 앨범 <Spain>을 녹음했다. 두 연주자의 음악은 피아노 연주자와 기타 연주자의 만남을 넘어서는 특별함을 들려주었다.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 미국에서 성장한 재즈 연주자와 스페인의 정통 플라맹코 기타 연주자가 지닌 서로 다른 음악적 배경, 그 차이 뒤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라틴 음악적 색채가 절묘하게 섞여 음악 장르, 민속적 공간, 문화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쩌면 두 연주자도 예상하지 못했을 지도 모를 이 뛰어난 결과물은 결국 2000년 처음 열린 라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라틴 재즈 앨범 부분을 수상하게 되었다.
두 연주자의 두 번째 앨범은 6년의 시간이 흐른 뒤인 2006년에 발매되었다. <Spain Again>이란 타이틀로 발매된 앨범에서 두 연주자는 누에보 탕고의 거장이었던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곡들을 비롯해 무대에서 관객들의 열광을 이끌어냈던 곡들을 연주했다. 그리고 이들 곡들을 통해 플라맹코, 아프로 쿠반 재즈, 삼바, 탕고 등 다양한 음악을 아우르는 두 연주자의 폭 넓은 음악적 소화력을 확인시켜주었다. 이에 대한 감상자들의 반응은 물론 호의적이었다.
이후 두 연주자는 솔로 활동을 이어가면서도 지속적으로 공연을 이어갔다. 공연에서 앨범 수록 곡 외에 새로운 곡들을 연주하는 등 모험을 계속했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두 연주자는 새로운 앨범을 녹음할 결심을 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 <Spain Forever>이다.
전반적으로 이번 새 앨범에서 두 연주자는 앨범 타이틀에서 전작과의 관련성을 드러냈듯이 이전 두 앨범들의 연장선상에 놓인 음악을 들려준다. 라틴 계열의 곡들을 두 연주자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바꾸어 연주할 뿐이다. 그만큼 이전 두 앨범에서 선보였던 음악이 두 연주자의 스타일로 굳어졌다는 뜻이리라. 또 그것이 그리워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새 앨범을 기다렸을 테고.
두 연주자는 이번 앨범에서 지난 1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로 그 음악을 들려준다. 상대 연주를 경청하고 공간을 배려한 연주로 듀오 연주의 백미를 다시 느끼게 해준다. 특히 양적인 측면에서 솔로와 반주를 나누지 않고 악기의 특성을 고려하고 곡의 전개에 따라 각각의 역할을 자연스레 결정하는 것은 두 사람이 음악적으로 완벽히 하나의 지향점을 향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해준다.
한편 전반적으로 앨범은 이전에 비해 서정성이 강조된 느린 연주가 주를 이룬다. 이를 변화라면 변화라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두 연주자가 연주한 곡들의 특성이 이런 결과를 낳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실 이번 앨범의 가장 큰 새로움, 매력은 두 연주자가 연주한 곡들의 다양성에 있다. 이전 앨범에서 두 연주자는 각각의 자작곡과 그들과 관련된 문화권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리코 작곡가들의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이번 앨범에서는 그 폭을 보다 넓혔다. 그 결과 브라질(에그베르토 기스몬티, 루이스 본파), 프랑스(에릭 사티, 장고 라인하르트), 이탈리아(엔니오 모리코네) 등의 곡들이 추가되었다.
그 가운데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곡은 최근 세상을 떠난 에그베르토 기스몬티의 “Água E Vinho(물과 와인)”과 찰리 헤이든의 “Our Spanish Love Song”을 연주한 것이다. 이들 곡들은 작곡자들이 직접 서정을 담뿍 담아 아름답게 연주했었다. 그래서 두 연주자들에게는 살짝 부담일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 이들은 그 우려를 지울만한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에그베르토 기스몬티의 곡의 경우 원래 기타 솔로 연주 곡이었는데 이를 두 연주자는 기타가 멜로디를 연주하고 피아노가 이를 확장해 슬픔을 안으로 삼킨 듯한 분위기를 강조해 극적인 면을 보다 강하게 드러냈다. 이어지는 찰리 헤이든의 곡의 경우 작곡가는 이 곡을 쿼텟과 듀오 연주로 녹음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팻 메시니의 기타와 자신의 베이스 연주로 했던 듀오 연주가 유명하다. 미셀 카밀로와 토마티토의 듀오 연주 또한 찰리 헤이든, 팻 메시니 듀오에 못지 않은 가슴 뭉클한 감정을 유발한다. 이러한 우수는 이어지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곡 “Oblivion 망각”으로 이어진다. 2006년에서 이미 이 누에보 탕고 작곡가의 곡들을 탁월한 해석으로 연주했던 것에 이어 이번 곡에서도 두 사람의 연주는 강렬하다.
한편 주어진 곡에 자신들의 색채를 가미해 새로운 맛을 부여하는 듀오의 장점은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클래식“Gnoissienne No. 1”와 집시 재즈 기타 연주자 장고 라인하르트의 “Nuages 안개”의 연주에서 제일 강하게 드러난다. 이들 곡 자체를 연주했다는 것만으로도 의외성이 강한데 이들 곡을 두 사람은 원곡에 다른 느낌을 부여했다.“Gnoissienne No.1”의 경우 원곡의 인상주의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스페인-아랍이 점령했던 시절의-적인 느낌을 주는 토마티토의 기타 연주가 곡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Nuages”도 마찬가지다. 원래 통통 튀는 2박의 집시 리듬을 바탕으로 조금은 경쾌하게 연주되곤 했던 이 집시 재즈 곡을 두 연주자는 느린 템포로 연주했다. 그러면서 멜로디에 담긴 신비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는 보다 더 살리고 집시 음악이 아닌 재즈의 스윙감이 돋보이게 했다. 특히 미셀 카밀로의 연주는 오스카 피터슨의 밝은 낭만을 연상시킨다.
보사노바의 인기에 큰 역할을 했던 브라질의 루이스 본파의 대표 곡으로 마르셀 카뮈 감독의 영화 <흑인 오르페>의 주제 곡인 “Manhã de Carnaval”의 연주도 새롭게 다가온다. 장고 라인하르트의 곡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연주자는 이 곡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사노바 리듬을 과감히 숨겼다. (어쩌면 두 연주자는 알 디 메올라와 존 맥러플린 기타 듀오의 연주에서 이런 시도의 단초를 얻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멜로디에 담긴 슬픈 서정을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미셀 카밀로의 솔로는 앞의 “Água E Vinho”만큼이나 극적인 비감을 드러낸다.
반면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시네마 천국>을 위해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두 곡 “Cinema Paradiso”와 “Love Theme From Cinema Paradiso”의 연주는 다른 곡들에 비해 평이한 편이다. 원곡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그래도 유지하려는 과정에서 곡에 특별히 손을 댈 필요가 없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두 곡은 원곡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주는 달콤함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그렇다고 악보대로 연주했다는 것은 아니다. 멜로디를 확장하는 솔로 연주는 두 연주자가 원곡의 정서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 개인적인 감상을 표현하려 했음을 느끼게 해준다.
평화로운 분위기의 짧은 소품 성격이 강한 곡으로 미셀 카밀로가 쓴“About You”에 이어지는 마지막 곡 “Armando’s Rhumba”는 첫 앨범의 “Spain”, 두 번째 앨범의 “La Fiesta”에 이어 세 번째로 연주하는 칙 코리아의 곡이다. “Spain”으로 두 연주자의 연주 활동이 시작되었던 만큼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매번 칙 코리아의 곡을 연주하는 것 같다. 다른 칙 코리아의 곡을 연주할 때처럼 이번 곡에서도 두 연주자의 하나된 호흡은 감탄할 정도로 훌륭하다. 근 20여년간 연주를 함께 하면서 쌓은 음악적 관계의 깊이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이처럼 앨범에서 두 연주자는 매우 다양한 곡들을 연주했다. 그리고 그 연주는 모두 어렵지 않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기 전에 와우! 하는 탄성과 함께 가슴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다양한 곡들의 선택이 두 연주자의 화려함을 드러내는 대신 어떠한 텍스트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두 연주자-두 연주자가 함께 한 묶음 단위로서의-깊은 개성을 확인시켜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지역의 다양한 스타일의 곡들이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보통의 연주곡집이 아니라 모든 곡들이 자연스레 하나로 이어지는 유기적인 앨범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게 한다. 마치 미셀 카밀로와 토마티토가 쓴 곡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에 사용된 “Forever”란 단어는 어감상 마지막의 느낌을 준다. 하긴 10년만의 새 앨범이 나왔으니 다음 앨범이 언제 나올지는 연주자들 본인도 확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Forever”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번 앨범을 들은 많은 감상자들은 이들 듀오가 오랜 시간(Forever) 함께 하며 더 많은 곡들을 새로이 연주하여 감동을 주기를 바랄 것이다. 나 또한 갈수록 깊어지는 두 연주자의 농밀한 호흡이 언제라도 좋으니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앨범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백마디 말이 직접 경험하는 것만 못하다는 걸 알지만, 재즈 스페이스 포스팅을 읽을때마다 느끼는 건 그 경험을 어쩜 이렇게 언어로 잘 표현할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솔직담백하면서도 배려를 잃지 않는 점이..개인적으론 참 좋네요.
결론은 포스팅을 읽고나니 앨범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는..^^
핫 제가 그런가요? 배려까지 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ㅎ
아무튼 이번 앨범 편안히 그러면서도 가볍지 않게 듣기에 참 좋은 앨범입니다. ㅎ
아..배려란게, 앨범이나 연주에 대해 비판만하기보다 장단점을 함께 보려고 하시는 느낌을 많이 받아서..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것 같습니다.^^
드디어 주문한 앨범이 도착해서 듣고 있는데, 음악이 자분자분한게 좋습니다.
햇살좋고 단풍잎이 알록달록하게 진 완연한 가을보다 낙옆이 우수수떨어지고 나무들도 앙상한 모습을 보이는 요즈음 같은 늦가을이나 초겨울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네요.
퇴근길에 왠지 계속 듣게 될 것만 같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미셀 카밀로 앨범 제가 라이너를 써서 몇 장 받았는데 애독자 선물로 드릴걸 그랬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