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하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예술의 나라”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 문학, 미술, 영화, 음악 모두에서 프랑스는 오랜 역사와 깊은 저력을 지니고 있다. 예술의 중심이 미국으로 상당부분 이동한 지금도 프랑스는 예술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정작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과학 등을 먼저 생각한다.)
재즈 시대를 받아들이다
프랑스가 향유하고 생산하는 예술 중에는 재즈도 포함된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 음악을 프랑스는 다른 어느 국가보다 일찌감치 받아들였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에 왔던 미군들을 통해 재즈를 받아들였으니 재즈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1920년대의 뉴 올리언즈 재즈부터 받아들인 셈이다. 재즈의 고향 뉴 올리언즈가 과거 프랑스령이었던 것-뉴 올리언즈란 이름은 파리에서 가까운 오를레앙(Orléans)의 새로운 도시를 의미한다-을 생각하면 어쩌면 프랑스인들은 숙명적으로 재즈에 가까워졌는지도 모르겠다.
이 무렵 재즈는 해외 팝 음악과 같았다. 프랑스인들은 재즈를 새롭고 현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재즈가 아닌 음악에도 재즈란 표현을 붙이곤 했다. 그래서 그들이 좋아했던 음악, 인기를 얻었던 음악 중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재즈가 아닌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당시 프랑스인들은 재즈의 음악적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했던 것 같다. 재즈를 되는 대로 마구 연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자유 즉흥 연주를 즐기는 연주자들이 이미 있었다니 말이다. 재즈가 낯설었기에 집단 즉흥 연주를 펼치는 뉴 올리언즈 재즈를 그저 어지러운 음악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재즈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열광은 재즈적 색채가 가미된 샹송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프랑스적인 것이 사라진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큰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감상자 집단에서도 프랑스적인 재즈를 향한 움직임이 생겼다. 샤를 들로네이, 위그 파나시에 등의 평론가들이 등장해 핫 클럽 드 프랑스(Hot Club De France)라는 동호회를 만들어 재즈의 저변을 확대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장고 라인하르트, 스테판 그라펠리가 이끌었던 퀸텟트 뒤 핫 클럽 드 재즈(Quintette du Hot Club De Jazz)의 결성을 후원하기도 했다. 알려졌다시피 이 그룹은 결국 미국에서도 성공을 거두며 집시 재즈의 전통을 확립하게 된다.
한편 2차 대전 중 독일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에는 미국적인 것을 금지했던 독일의 정책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어로 재즈를 노래하는 등 보존해야 할 프랑스 문화의 하나로 재즈를 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유명 연주자들과의 교류 속에 재즈 문화를 꽃피우다
하지만 이런 특별하고 흥미로운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하드 밥 시대까지 프랑스에서 재즈는 미국의 것이라는 인식이 더 강했다. 사람들은 재즈는 미국 흑인이 연주해야 제대로 된 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국의 백인 연주자들은 외면을 받았다. 그래서 프랑스 연주자들은 일자리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구해도 흑인 연주자에 비해 매우 낮은 보수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많은 미국 연주자들이 프랑스를 찾았다. 그들은 재즈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애정, 연주자에 대한 환대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시드니 베쉐, 덱스터 고든, 버드 파웰, 케니 클락, 돈 바이어스, 아치 쉡 등의 연주자들은 아예 프랑스에 오랜 시간 거주하기도 했다. 한편 마일스 데이비스는 잠깐이었지만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인종차별이 없는 프랑스인들의 환대와 여배우 줄리엣 그레코와의 로맨스로 인해 프랑스에 머무는 것을 고민하기도 했다.
이러한 미국 연주자들의 잦은 공연과 체류는 프랑스 연주자들에게 실력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멤버의 이합집산이 워낙 빈번했던 비밥과 하드 밥 시대의 상황에서 미국 재즈 연주자들은 밴드를 완전히 구성하지 않은 채, 혹은 홀로 프랑스를 방문하는 일이 잦았다. 이 경우 프랑스 연주자들이 그 빈자리를 메워 미국 연주자들과 함께 했다. 피에르 미슐로, 마르시알 솔랄, 르네 위르트레제, 바니 윌랑 등의 연주자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미국 연주자들의 공연이나 앨범 녹음에 세션으로 참가하면서 재즈적 자양분을 습득했다.
재즈의 본고장 출신의 연주자들이 꾸준히 프랑스를 찾고 이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응이 컸던 만큼 생 제르맹 데 프레 지역과 몽파르나스 지역을 중심으로 재즈 클럽 또한 많아졌다. 그 가운데 르 카보 드 라 위쉐트(Le Caveau de la Huchette)는 프랑스 연주자들과 미국 연주자들의 교류가 빈번하게 있어났던 명소였다.
연주자가 있고 공연이 있었기에 음반이 제작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 결과 바클레이 레이블을 비롯해 브룬스빅, 블루 스타, 클럽 프랑세 뒤 디스크 21 등의 레이블이 등장해 재즈 앨범을 제작했다. 또한 필립스, 머큐리, 폴리돌, 폰타나 같은 세계적인 레이블들도 프랑스에서 연주되는 재즈를 녹음해 앨범으로 발매했다. 그 결과 아트 블레이키, 리오넬 햄튼, 모던 재즈 쿼텟, 쳇 베이커, 도날드 버드, 맥스 로치 등 재즈사의 명인들의 앨범들이 발매되었다. 그리고 이들 앨범에는 대부분 프랑스 연주자들이 세션으로 참여했다. 또한 이미 실력을 인정받은 미셀 르그랑, 기 라피트, 베르나르 파이퍼, 르네 위르트레제, 스테판 그라펠리 등 프랑스 연주자들의 앨범도 제작되었다. 이들 앨범은 프랑스 재즈의 역사를 축적하며 감상자에게 보다 폭 넓은 취향을 지닐 수 있도록 했다.
남들과 다른 프랑스만의 재즈를 찾다
이전 장고 라인하르트와 스테판 그라펠리의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하드 밥 시대까지 프랑스 연주자들은 미국 재즈의 흐름을 따랐다. 날렵한 스윙감과 자유로운 즉흥 연주, 블루스적인 정서를 표현하려 노력했다. 그들 중 몇은 미국 연주자들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울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재즈의 위상이 갈수록 떨어지고 그 무렵 등장한 프리 재즈가 사고의 지평을 미국 밖으로까지 확장하며 음악적 사고가 아닌 문화적 사고를 요구하면서 프랑스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그들만의 재즈,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재즈를 만들겠다는 욕구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국 연주자처럼 스윙하고 블루지할 수는 있지만 그 방면에서 미국 연주자 이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그 결과 클래식, 발스 뮤제트-아코데온이 중심이 된 전통 왈츠 음악- 등 프랑스의 음악적 전통을 재즈 안으로 흡수하고 나아가 프랑스가 한 때 지배했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음악적 색채도 수용했다. 그렇다고 연주자들이 프랑스 재즈를 목적으로 두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연주자들과 다른 자신만의 것을 찾으려 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 미셀 포르탈, 다니엘 위마이르, 루이 스클라비, 디디에 록우드, 에디 루이스, 베르나르 뤼바, 앙리 텍시에 등 개성 강한 연주자들이 등장하며 프랑스 재즈를 두텁게 했다. 그 사이 해외 연주자들과의 교류도 꾸준히 일어났다. 그런 중에 장 뤽 퐁티, 미셀 페트루치아니, 장 미셀 필크, 마뉘 카쉐, 비렐리 라그렌 등 프랑스를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연주자들도 생겼다. 또한 알도 로마노, 리차드 보나, 에릭 트뤼파즈, 브누아 델벡, 그리고 나윤선 등 다른 국가 출신의 연주자들이 프랑스에서의 활동을 발판으로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일도 발생했다.
현재 프랑스는 재즈를 자신들의 문화처럼 여기고 이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 연주자들이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정부는 실업급여 제도를 마련했으며 저작권 단체들은 비인기 장르의 앨범 제작에 지속적인 지원을 한다. 또한 기업이나 대사관 등은 자국 연주자의 활발한 해외 공연을 위해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환경들이 프랑스를 재즈 강국으로 만들고 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유럽 재즈의 수도라 불린다.
저는 에두아르 페를레나 앙리 텍시에..밖에 모릅니다만, 프랑스의 재즈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지원이 부럽기 그지 없습니다.
문화를 이해하고 지원하는 법을 아는 나라가 아닌가 싶어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