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화(素來花) – 강태환 (Audioguy 2011)

프리 뮤직의 진수를 담은 앨범

ktw최근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활동하는 연주자나 보컬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미 오래 전에 우리에게는 세계적으로 인정 받은 연주자가 있다. 바로 색소폰 연주자 강태환이다. 1970년대부터 프리 뮤직을 연주하기 시작한 그는 세계적인 인정을 넘어 분야의 거장으로 인정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의 존재는 전설에 가깝다.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사라져서 전설이라는 것이 아니다. 실제 그의 음악과 연주를 접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끝내주는 연주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강태환이라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만 여기저기 회자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의 앨범이 국내에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피아노 연주자 미연, 타악기 연주자 박 재천과 함께 한 앨범 <Improvised Memories> 정도는 음반은 아니어도 디지털 음원으로 감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나머지 그의 앨범들은 대부분 해외에서 제작되었기에 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오디오 가이 레이블에서 이 색소폰 연주자의 앨범을 녹음한 것은 그 자체로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다른 연주자들과의 협연이 아니라 그 혼자만의 솔로 연주로만 채워진 앨범을 말이다.

 

강태환은 자신의 음악을 프리 재즈가 아닌 프리 뮤직으로 설명한다. 프리 재즈가 아무리 자유로워도 재즈를 근본에 두었다면 그의 프리 뮤직은 그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음악적 의지와 상상력에만 의존해 연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앨범에 담긴 음악은 50년 이상 자신을 연마한 연주자의 거대한 상상력에 감탄하고 이 상상력을 구현하는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고도의 연주력에 놀라게 한다. 전설 아닌 전설의 연주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전설이 실제로 대단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이것은 앨범의 첫 곡 “20 Years Ago”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이 곡에서 연주자는 몇 개의 음을 연결해 하나의 동기를 만들고 이것을 무한 반복하면서 조금씩 그 동기를 변화시켜 나간다. 그리고 그 사이 또 다른 동기가 간간히 개입해 움직임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자연스레 시간의 흐름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이 20년 전의 사건이건 20년간 조금씩 진행되어 온 무엇이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어지는 곡들에서도 그의 상상력은 낯설고 기이한 음악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기이함은 감상자의 음악 경험을 근본적으로 배반한다. 무엇보다 주제를 형성하는 멜로디를 단번에 파악하기 어렵다. 작곡이라 할 수 있는 동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멜로디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보다는 특정한 음을 오랜 시간 지속하고 그 와중에 혀의 움직임으로 톤을 바꾸고 때로는 비브라토를 넣어 파동을 생성해 지속의 느낌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분위기가 테마 역할을 한다. 그래서 생각보다 앨범에 수록된 연주들은 낯설기는 해도 어지럽거나 복잡하지는 않다.

한편 질감의 차이를 바탕으로 시간을 이어가는 그의 솔로는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간간히 동양적 여백의 미를 드러내곤 한다. 단순히 솔로 연주이기 때문에 비어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아니다. 거칠고 뻑뻑한 질감으로 소음에 가까운 연주를 펼치는 중 불쑥 수묵화에 가까운 순간을 연출한다는 것인데 타이틀 곡이나 “Rain”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소리들의 변형과 연쇄가 미로처럼 감상자를 헤매게 할 때 갑작스레 익숙한 정원 같은 풍경이 나올 때는 인상적인 후렴구를 만난 것만큼이나 짜릿하다.

강태환이 만들어 낸 소리의 풍경에 반응하는 것도 신선한 경험을 제공하지만 그 풍경을 만들기 위해 그가 사용한 연주법 또한 감탄을 자아낸다. 색소폰 연주자는 이 앨범을 스튜디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일체의 오버더빙 없이 녹음했다. 그런데 그의 색소폰 솔로 연주는 단선율 악기의 한계를 넘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왼손과 오른손이 각기 다른 연주를 할 수 있는 건반 악기나 아예 두 대의 악기가 합주를 하는 듯한 순간을 종종 연출한다. 특히 “20 Years Ago”나 “Tidal Wave”같은 곡에서는 연주자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나 오르간으로 연주되는 필립 글래스의 미니멀 음악을 염두에 두고 연주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소리가 동시에 발생해 귀를 매혹시킨다.

 

여러 매혹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오로지 순간의 감흥에 의존해 이어간 연주이기에 그 순간 밖에 위치한 감상자가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음은 분명하다. 설령 프리 재즈에 익숙한 감상자라 해도 이를 받아들이기에는 깊은 감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 앨범을 지난 10년 한국 재즈의 명반으로 선정한 사람들도 실은 앨범에서 받은 인상과 그에 따른 선정 이유가 다 다를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나는 이 앨범이 연주자의 알 수 없는 독백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잘 모르겠다 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그 모호함 자체로 감상자를 설득시킨다. 멜로디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연주자가 순간의 감흥에 의해 연주를 이어가는 그 과정에 집중하는 순간 오랜 시간의 연습과 연구를 통해 악기의 한계를 넘어 선 표현력과 이를 바탕으로 한 그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형체 없이 색이나 선 등만으로 다소 어렵게 표현한 추상화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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