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Coltrane – Soultrane

여러 매체를 통해 밝혔지만 나는 재즈의 매력을 존 콜트레인을 통해 알았다. 정확하게는 그를 통해 재즈에 대한 각성을 얻었다. 그 전에도 재즈를 듣고 있었으니까. 다만 빈약한 한자 실력만으로 알 수 없는 부호로 가득한 도쿄 거리를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에 있어서 부족함이 많았다. (그래도 아랍이나 러시아의 어느 도시에 던져진 느낌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런 중 존 콜트레인의 앨범 <Soultrane>은 재즈라는 언어를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그의 연주가 친절하니 이 앨범으로 재즈 감상을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오로지 존 콜트레인과 나 사이에서만 발생한 교감이었으니까. 길을 가다가 우연히 눈을 마주친 것 같다고 할까? 운명을 바꾸는 눈빛의 교환 같은 것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그 마주침이 약 30년의 시간차를 넘어 이루어진 것이니 대단한 것 같기는 하다.

존 콜트레인의 연주를 통해 내가 깨달았던 것은 재즈는 자유지만 그것이 경계를 넘어서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되는대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뒤로 정해진 규칙이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재즈가 혼자가 아닌 여럿의 음악이요, 설령 혼자만의 음악이라 할 지라도 무아(無我)의 음악은 아님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나 스스로도 상승을 거듭해 몰아(沒我)의 경지로 이끄는 연주를 종종 접했으니 말이다. 존 콜트레인 또한 그랬다. 그래서 이 깨달음을 비밥, 쿨, 하드 밥에 해당하는 것으로 한정하고 싶다. )

재즈가 작동하는 원리? 연주자들이 정해진 길에서 속력을 마음껏 조절하고, 차선을 바꿔가며 달리기는 하지만 결코 길 밖으로 나가지는 않음을 확신한 후부터 나는 재즈를 마음껏 듣게 되었다. 재즈에 대한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도로 밖을 벗어난 재즈, 무인도에서 홀로 외치는 듯한 재즈까지 듣고 그 안에서 나만의 느낌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의 나는 과거보다 재즈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모든 것이 다 거기서 거기 같다는 느낌이다. 안주하지 않고 이런저런 새로운 것을 자꾸 듣고 또 들었는데도 그렇다. 새로움의 쾌감만을 추구한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탈주의 욕망에만 치우쳐 재즈로부터 멀어진 음악, 마음에 닿기도 전에 휘발해버리는 음악이 많아졌다는 느낌도 받는다. 그래서 1986년 프랑스의 미셀 클로드 잘라르가 “재즈는 여전히 가능한가?”라는 책을 썼듯이 나 또한 유사한 글을 써볼까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존 콜트레인의 90번째 생일-세상을 떠난 자에게 생일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마는-날 모처럼 앨범 <Soultrane>을 들으니 내가 재즈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가질 정도로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재즈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내 고민이 어느 정도는 유효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나의 문제였다. 이것저것 새로움에 취해 재즈를 들으면서 그 시작점을 잊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멀리 나와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어버린 길 고양이 같다고 할까? 즉, 나의 혼란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모든 길은 종착지는 없을 수 있어도 출발지는 늘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 출발지를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Soultrane>과의 첫 마주침으로부터 다시 3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앨범을 들으며 나는 재즈가 여전히 내 삶을 새롭게 하는 즐거운 음악임을 깨달았다. 재즈를 다시 어떻게 들어야 할 지도 확인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존 콜트레인에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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