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볼페르트 브레데로데가 국내에 알려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수잔 아부엘의 앨범을 통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이 스위스 출신의 보컬 앨범에서 그의 피아노는 보컬만큼이나 영롱한 존재감을 빛냈다. 단번에 그의 리더 앨범이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 기대대로 ECM에서 그는 두 장의 앨범 <Currents>(2007), <Post Scriptum>(2011)을 발표했다. 쿼텟 편성으로 제작된 이들 앨범들은 재즈와 클래식을 바탕으로 한 아름답고 시적인 음악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5년만의 이번 새 앨범에서 그는 처음으로 트리오 연주를 선보인다. 이것이 매우 흥미롭다. 그는 외모와 달리 1974년생으로 2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중견 연주자이다. 하지만 다양한 프로젝트와 그룹 활동으로 자신의 리더 앨범이 많지 않을뿐더러 전통적인 피아노 트리오 앨범을 녹음한 적이 전혀 없다. 믿기지 않은 일이지만 사실이다.
이번 트리오는 이전 두 장의 앨범을 함께 한 쿼텟의 멤버와 구성이 전혀 다르다. 아이슬랜드 출신의 베이스 연주자 굴리 구드문드손에 네덜란드 출신의 드럼 연주자 야스퍼 반 훌텐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트리오가 단순히 쿼텟의 축소판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전 앨범들은 작곡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면 이번 앨범은 트리오의 자유로운 인터플레이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로가 서로의 연주를 자극하고 영향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연주를 추구한다. 그만큼 순간적인 호흡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런 차원에서 네덜란드 왕립 음악원 수학시절에 알게 된 후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꾸준히 호흡을 맞추어 온 굴리 구드문드손이 제일 적합했다. 그리고 야스퍼 반 훌텐은 굴리 구드문드손과 함께 트럼펫 연주자 에릭 블로이만스의 그룹 게이트크러쉬에서의 호흡이 좋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고 순간적인 인터플레이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트리오의 연주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해 불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달콤하고 낭만적인 면이 더 강하다. 어두운 긴장이 큰 역할을 하지만 그것을 서정적인 분위기로 해소하는 연주를 펼친다. 스릴러 로맨틱 영화 같다고 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 곡 “Elegia”만으로 충분하다. 이 곡은 슬픔을 바탕에 두고 있다. 어둠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테마를 피아노가 확장하면 베이스와 드럼, 특히 드럼이 리듬이 아닌 다채로운 질감의 두드림으로 공간감과 색채감을 부여하며 정서적인 깊이를 더한다. 다른 곡들도 이처럼 명확한 정서적 지향점이 있다. 다만 그것을 조금은 느슨하고 자유로이 풀어갈 뿐이다.
그렇다. 느슨함이야 말로 이 앨범이 감상자에게까지 세 연주자의 감성을 전달하는 요인이 아닐까 싶다. 감정에 충실하지만 그 표현은 차분하고 사려 깊게 표현하기에 긴장 속에 서정이 깃들 수 있었던 것인데 이 모두 미디엄 템포 이하로 연주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앨범 타이틀을 “블랙 아이스”로 정한 것도 이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블랙 아이스’는 겨울철 아스팔트 표면의 작은 틈새로 눈, 습기, 매연, 먼지 등이 한데 뒤엉켜 스며들어 얼어붙은 것을 말한다. 블랙 아이스로 인해 길은 미끄러워 져 사고 위험이 증가한다. 따라서 운전자는 긴장을 유지한 채 운전해야 할 것이다. 기왕이면 속도를 줄이면 더 좋을 것이다. 트리오의 연주가 정말 그렇다. 긴장으로 가득한 공간 속을 천천히 달린다. 하지만 실제 자동차 운전이 아닌 만큼 트리오는 그 긴장을 즐기며 서정을 불어넣어 위험한 운전을 낭만적인 것으로 바꾸어 넣는다.
서정적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사르르 녹는 아이스크림 같은 연주는 아니다. 적당한 양감이 있는 연주다. 쓴맛, 단맛, 신만, 짠맛, 그리고 향이 어우러진 커피 같은 연주랄까? 약간의 집중을 하면 깊은 맛을 느끼게 되는……트리오(!) 연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