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김우룡역, 열화당 2005)을 읽고 있다. 저자가 소설가이자 사회평론, 미술평론가이기에 무슨 사진과 관련된 책이라 생각했는데 그가 만났던 이런저런 사람들과 관련된 추억을 담담히 쓴 책이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좋은 책이다. 문체도 좋고.
책에서 네 번째 글로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했던 경험의 하나를 기록한 “라코스테 스웨터를 입은 남자”를 읽던 중 흥미로운 문장을 발견했다.
“한 죄수가 탈옥에 ‘성공하면’, 안에 남은 사람들은 마치 위대한 예술작품을 말하듯 그 위업에 대해 얘기하고 또 그것을 꿈꾼다. 그렇다, 그건 걸작품이다. 상상력과 독창성, 극기와 끈기, 계획과 집중에 있어 이 업적은 도나텔로가 제작한 피렌체 성당 제의실의 청동문들과 또 셀로니어스 멍크가 연주하는 「에피스트로피」에 비견된다.”
다른 독자들을 그냥 넘어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선 델로니어스 몽크-나는 이 발음이 더 편하다-가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다. 의외의 장소에서 친구를 만난 느낌이다. 작가도 재즈를 좋아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왜 여기서 괴팍한 피아노 연주자의 곡이 등장했을까 생각했다. 그는 한 죄수의 성공한 탈옥은 위대한 예술작품 같은 것이고 그것은 “에피스트로피”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에피스트로피”가 위대한 예술작품이라는 것인데. 과연 작가가 단순히 글을 쓰던 중 위대한 예술작품의 예로 불현듯 몽크의 곡이 떠올랐던 것인지, 아니면 이보다 섬세하게 상상력, 독창성, 극기, 끈기, 계획, 집중이 어우러져 나온 위대한 결과물로 “에피스트로피”를 특정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이 곡을 <Genius of Modern Music vol.1>에 수록된 버전으로 다시 들었다. 긴장 가득한 피아노 인트로가 계단을 올라가듯 유사 반복의 형태로 제시되고 밀트 잭슨의 비브라폰이 넌지시 테마를 제시하고 솔로를 이어가는, 비밥의 어법에 충실한 곡이다.
몽크는 이 곡을 1941년에 작곡했다. 그리고 다음 해 쿠티 윌리엄스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이 곡을 녹음했다. 그 때는 “Fly Right”이란 이름이었다. 연주 또한 비밥이 아닌 스윙시대의 날렵한 움직임이 강조되었다.
그런 것이 후에 제목이 “Epistrophy”로 바뀐 것인데 평소 몽크는 자신의 곡에 조금은 거창한 제목을 붙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 제목만 해도 실은 없는 단어이다. 다만 “Epistrophe 결구반복”를 몽크가 실수로 혹은 의도적으로 잘못 쓴 것이 아닌가 싶다.
몽크의 연주를 들으면서 나는 존 버거가 이 곡을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언급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작가는 몽크의 곡들이 비밥 시대를 개척한 곡들이라는 생각 이전에 그의 곡들이 당대의 규범을 과감히 파괴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나 싶다. 즉, 스윙의 규칙에서 탈주한 음악이었다는 것.
아니 역사적인 면 이전에 이 곡은 음악 자체가 매우 독창적이다. 여백을 불안하고 위태롭게 뒤뚱거리지만 그 풍채만큼은 거인과도 같다. 게다가 그 거인은 목적지를 향해 자기 속도로 부단히 나아간다. 분명 다른 동료의 비밥과도 차별되는 상상력이 만들어 낸 독창적인 움직임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은 고도로 집중해야 보조를 맞출 수 있는.
감시가 심한 감옥에서 몰래 나오기 위해서는 이런 상상력과 움직임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쩌면 세계 어느 곳의 감옥에 수감된 죄수 중 한 명은 이 곡을 듣고 또 들으며-이것이 Epistrophe의 예이다- 탈주를 몇 년째 계획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