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움직이는 따스하고 정겨운 노래
재즈 보컬 하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빌리 할리데이, 엘라 핏제랄드, 사라 본 등의 여성 보컬을 먼저 떠올린다. 현재는 백인 여성 보컬들의 비중이 상당히 늘었고 나아 재즈 보컬을 주도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여전히 재즈 보컬 하면 흑인 여성 보컬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남성 보컬로 시선을 돌리면 상황은 역전 된다. 프랑크 시나트라, 멜 토르메, 토니 베넷 등 그윽한 중저음으로 노래하는 백인 크루너 보컬들이 진정한 재즈 보컬로 인정 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재즈 보컬의 방향을 제시한 루이 암스트롱을 필두로 냇 킹 콜,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캡 칼로웨이, 지미 러싱 등의 뛰어난 흑인 보컬이 있기는 했다. 이들은 여성 디바들처럼 소울풀한 혹은 블루지한 창법으로 재즈의 진득한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하지만 인기의 측면에서는 (루이 암스트롱을 제외하고) 백인 크루너 보컬을 뛰어 넘을 수 없었다. 게다가 요즈음은 갈수록 흑인 남성 보컬이 드물어지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고리 포터의 존재는 매우 반갑고 특별하다. 그는 마이클 부블레, 존 피자렐리, 해리 코닉 주니어, 제이미 컬럼, 커트 엘링 등 백인이 주도하는 남성 보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다시 흑인 보컬 쪽으로 돌렸다. 나아가 재즈를 넘어 팝 음악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는데 성공했다. 특히 세 번째 앨범이자 블루 노트 레이블에서의 첫 번째 앨범이었던 <Liquid Spirit>은 영국에서 플래티넘,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에서 골드 레코드를 획득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백만 장 이상 판매되었고 요즈음 음악 시장의 대세인 온라인 시장에서도 2천만번 이상 스트리밍되는 인기를 얻었다. 그 결과 2014년 그래미 상에서 최우수 재즈 보컬 앨범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에스콰이어지(誌)와 NPR 뮤직에서는 그를 ‘미국의 차세대 위대한 재즈 보컬’로 지명하기도 했다.
그의 어린 시절 꿈은 보컬이 아닌 미식 축구 선수였다. 실력 또한 샌디에고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어깨 부상으로 미식 축구 선수로서의 꿈을 접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이제는 트레이드 마크가 된 챙이 평평한 모자를 쓰고-실은 다친 상처를 가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냇 킹 콜에 도취되어 따라 부르면서 소질을 보였던 노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런 중 지역의 재즈 클럽을 전전하며 노래하던 중 그는 제작자 카마우 케니야타를 만나면서 음악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오랜 시간 무명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1999년 블루스 음악의 역사를 다룬 뮤지컬 <It Ain’t Nothin’ But the Blues>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앨범을 녹음하기 까지는 이후에도 10년 이상의 시간을 더 보내야 했다.
그래도 시작은 늦었지만 성공은 빨랐다. 2010년에 선보인 첫 앨범 <Water>는 53회 그래미상 최우수 재즈 보컬 앨범 후보에 오르고 2012년에 발표된 두 번째 앨범 <Be Good>은 타이틀 곡이 55회 그래미상 최우수 트래디셔널 R&B 퍼포먼스 후보에 오르는 등 평단의 호평과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그 결과 블루 노트와 계약하게 되고 <Liquid Spirit>로 세계적인 성공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세계적 성공은 구수하고 푸근한 바리톤의 목소리, 그 목소리로 꾸밈 없이 담백하게 부르는 노래, 재즈와 소울, R&B를 가로지르는 폭 넓은 음악성, 친근한 멜로디를 만들어 내는 작곡 능력 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요소들이 적절한 조합으로 버무려지면서 모르는 사이에 좋아하게 되는 정겨운 매력을 발산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통산 네 번째 앨범에서도 유효하다. 새로운 무엇을 추가하지 않으면서도 장르를 넘나드는 첨단의 세련미와 오래된 친구 같은 정겨움이 공존하는 음악과 노래를 들려준다. 다시 한번 세계적인 인기를 얻을만하다.
지난 앨범의 성공을 지속하기 위해 그는 제작자 카마우 케니야타와 외에 칩 크로포드(피아노), 애런 제임스(베이스), 엠마누엘 해롤드(드럼), 요수케 사토, 티본 페니컷(색소폰) 등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연주자들을 다시 모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전 앨범들과 연속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갑작스럽다 싶을 정도의 큰 성공으로 세계 곳곳을 다니며 공연을 이어가는 그로서는 든든하고 편안함을 주는 제작자와 연주자를 곁에 두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들 오랜 동료들은 재즈를 근간으로 소울, R&B, 팝 등 장르를 가로지르는 그레고리 포터를 지원하며 그가 노래에 담고 싶어했던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해주었다.
물론 알리시아 올라투자(보컬), 키온 해롤드(트럼펫), 온드레이 피베치(오르간) 등 새로이 참여한 연주자들도 있다. 그 가운데 그레고리 포터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며 전체 사운드에 정서적인 깊이를 더해주는 알리시아 올라투자의 노래가 인상적이다.
작곡 또한 한 곡을 제외하고는 그레고리 포터 혼자 혹은 공동으로 쓴 곡들로 이루어졌다. 그의 곡들은 그리 복잡하지 않은, 조금만 노력하면 따라 부를 수 있는, 경우에 따라서는 하루 종일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을 중독성 있는 매력을 지녔다. 그를 포함해 칩 크로포드, 카마우 케니야타가 함께 한 편곡 또한 이 단순함을 잘 반영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보컬의 존재감이 강하게 부각된다.
앨범의 첫 곡 “Hold On”이 좋은 예이다. 지난 앨범 <Liquid Spirit>이 EDM 음악 쪽 DJ들의 관심을 받았던 것처럼 이 곡 또한 지난 해 영국 출신의 듀오 디스클로져의 앨범 <Caracal>에서 강렬한 전자 리듬과 화려한 편집을 통해 EDM 스타일의 곡으로 먼저 공개되었다. 하지만 이번 앨범에서는 간결한 편곡으로 곡이 지닌 자연적 공간감을 최대한 강조했다. 그리고 그레고리 포터 자신의 따스한 목소리로 공간을 채웠다.
“Hold On”에 이어지는 브라스 섹션과 오르간 등의 울림이 블루지한 매력을 풍기는 “Don’t Lose Your Steam”또한 앨범 발매 전에 먼저 싱글로 발매되면서 프랑스 DJ 프레드 폴크의 리믹스 버전을 함께 공개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 두 곡은 전면에 배치된 것처럼 이번 앨범의 대중적 인기를 이끄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희망과 용기를 주는 가사와 일렉트로니카 뮤지션들의 관심을 받을 정도로 감각적인 편곡과 노래는 분명 지난 ‘Liquid Spirit’에 비교할 만 하다.
이 외에 앨범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재즈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Fan The Flame”과 탄력적인 베이스와 화려한 리듬, 그리고 화사한 브라스 섹션이 어우러진 “French African Queen”또한 비슷한 관심을 받지 않을까 싶다.
위에 언급한 곡들이 대중적인 관심을 받을만한 것이라면 나머지는 감상자 개개인의 마음을 파고드는 곡들이다. 나는 이들 곡들에 이번 앨범의 진정한 매력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강렬함 대신 편안함, 소박함, 정겨움을 앞세운 곡들인데 모두가 감상자의 마음을 건드린다.
타이틀 곡이 대표적이다. 그레고리 포터의 힘을 뺀 목소리와 알리시아 올라투자의 부드러운 코러스가 편안하고 따스한 느낌을 주는 이 곡은 경쟁의 긴장 속에 살아가는 감상자를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은 안식처로 이끄는 힘이 있다. 실제 그레고리 포터는 이 곡을 프란시스 교황이 뉴욕을 방문했을 때 어린 시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과 쉴 곳을 제공했던 어머니의 추억을 떠올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곡을 썼다고 한다.아직 이 곡을 듣는 당신은 어려운 자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위치일 것이다. 그럼에도 따스한 위로의 말을 듣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미디엄 템포의 발라드 곡 ‘Consequence of Love’, ‘Don’t Be A Fool’, ‘Insanity’등의 곡에서도 반복된다. 사랑을 주제로 한 이들 곡들은 사랑은 결국 남녀 둘이 하는 것이고 서로 마음이 맞지 않다면 서로 맞추어 나가야 하는 것임을 노래한다. 즉, 현명하고 진실한 사랑의 충고를 낭만적인 목소리로 전한다.
가족을 위한 노래도 있다. 어린 시절 그레고리 포터는 아버지와의 유대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자랐다. 음악적 소양도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았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그에게 다른 누구보다 감사의 대상인데 이번 앨범에서 그는 “More Than A Woman”을 통해 이를 표현했다. 단순한‘여성’이상의 고귀한 존재로 표현한 ‘어머니’에 대한 그의 사랑이 노래를 통해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한편 그의 사촌 달린 앤드류가 작곡한 “In Heaven”은 평소 가족 중 누가 세상을 떠나면 그의 명복을 기리며 부르곤 했던 일종의 가족의 노래라 한다. 슬픔에 머무르지 않는 차분한 분위기의 노래가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한편 ‘Day Dream’은 ‘Don’t Lose Your Steam’과 함께 아직 어린 그의 아들 데미얀을 위한 노래라 한다.
한편 “In Fashion”, “Fan The Flame”, “French African Queen” 등의 곡은 앨범 타이틀 곡처럼 세상을 향한 그레고리 포터의 마음을 담은 노래들이다. 그 가운데 “In Fashion”은 자아 도취에 대한 경고를, “Fan The Flame”은 불의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의 메시지를, “French African Queen” 은 미국의 흑인 남자나 프랑스의 흑인 여성이나 모두 같은 혈통 가사처럼 세계에 퍼져 있는 흑인적인 것, 흑인 문화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지를 그는 강요하지 않는다. 공들인 음악을 통해 설득한다. 특히 “In Fashion”같은 곡은 다소 풍자적인 느낌의 가사와 달리 사운드에 있어서는 다른 어느 곡보다 감각적이고 세련되었다. 달콤한 분위기를 원하는 감상자들은 이 곡에 제일 먼저 손이 갈 것이다.
나는 사실 <Liquid Spirit>과 그레고리 포터의 인기가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재즈에 머무르지 않고 소울, R&B, 일렉트로니카 등 다른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을 대중적인 입장으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이번 앨범을 듣고 내가 큰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재즈라는 장르에 충실한 보컬보다는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보컬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재즈 보컬의 영역을 확장하게 된 것은 마음으로 노래한 것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편안하게 감상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노래로 보아 그의 인기는 오랜 시간 지속될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이번 앨범으로 완전한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당신 또한 그렇게 되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