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스 데이비스의 암흑기를 다룬 영화 <Miles Ahead>
최근 유명 재즈인의 삶을 다룬 영화가 연이어 개봉하고 있다. 쳇 베이커의 삶을 다룬 <Born To Be Blue>, 니나 시몬의 삶을 다룬 <Nina>,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삶을 다룬 <Miles Ahead>가 그 것. 국내에는 아직 한 편도 개봉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어 재즈 애호가들을 기쁘게 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은 그 가운데 <Miles Ahead>의 사운드트랙이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재즈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언급되어야 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1940년대 비밥 시대에 등장한 이후 시대를 앞서가는 음악적 상상력으로 쿨 재즈, 하드 밥, 퓨전 재즈 등을 만들며 재즈의 역사를 주도했다. 감히 말한다면 그의 음악 인생이 곧 재즈의 역사였다.
따라서 그의 삶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호텔 르완다>, <오션스 12>, <아이언맨 2> 등으로 친숙한 돈 치들이 제작과 감독 그리고 주연까지 맡아 마일스 데이비스의 전기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드디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과연 음악적으로 변화가 많았고 입이 걸었으며, 많은 연주자들을 이끌었던 이 위대한 재즈인의 일대기를 어떻게 영화에 넣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재즈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을 주제로 한 영화인만큼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찰리 파커를 주제로 만든 영화 <Bird>에 버금가는 뛰어난 영화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암흑기를 다루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나도록 영화가 제작을 마쳤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아 그냥 무산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실은 그 사이 돈 치들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삶을 과연 영화에 담을 수 있는가를 두고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사실 마치 한 과제를 해결하면 다음 무대로 이동하는 게임 같았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삶 전체를 두 시간 남짓한 영화에 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돈 치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먼저 그는 파란만장했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삶 가운데 한 시기를 조명하기로 결정했다.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술과 마약 중독 등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무대에서 떠나 있었던 시기라는 것이 흥미롭다. 음악인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가 그가 음악적으로 생산적이지 못했던 시기를 이야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선택 자체가 극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뿐이 아니다. 돈 치들은 여기에 가상의 사건을 하나 더 풀어 놓았다. 재즈 계를 떠난 사이에도 마일스 데이비스가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공개 녹음 테이프를 두고 총격전과 자동차 추격 등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일이 있어났다는 것이다.
가상의 사건을 넣은 것에 대해서 나는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도 <Bird>에서 가상의 연주자를 등장시켜 찰리 파커 시대의 몰락을 그렸고, 빌리 할리데이의 삶을 주제로 했던 영화 <Lady Sings The Blues>는 빌리 할리데이의 삶을 축약하는 과정에서 사실 관계를 왜곡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와 영화는 다르지 않던가? 영화는 서사가 유기적이어야 하고 긴장과 갈등,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이 명확해야 한다. 말 그대로 극적인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따라서 돈 치들이 한 일련의 선택은 다큐멘터리가 아닌 영화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장면에 어울리는 선곡
1970년대 후반 마일스 데이비스의 암흑기를 주제로 한 만큼 그 근처 시기의 음악이 영화를 장식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음악을 담당한 로버트 글래스퍼와 돈 치들은 11곡의 마일스 데이비스의 곡을 사용하면서 6곡을 마일스 데이비스의 퓨전 재즈 시대에서 선택했다. 그 결과 마일스 데이비스가 퓨전 재즈의 가능성을 탐구했던 앨범 <Filles De Kilimanjaro>(1968)에 수록된 “Frelon Brun”을 비롯해 <Directions>(1970)에 수록된 “Duran(Take 6)”, <Big Fun>(1970)에 수록된 “Go Ahead John”, <On The Corner>(1972)에 수록된 “Black Satin”, <Agharta>(1975)에 수록된 “Prelude #II”,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복귀를 알렸던 <The Man With The Horn>(1981)에 수록된 “Black Seat Betty” 등이 선곡되었다. (참고로 “Duran(Take 6)”과 “Go Ahead John”은 <The Complete Jack Johnson Sessions>(2003)에 합본되어 실려 있기도 하다.)
이들 곡들은 모두 록적인 리듬과 강렬한 기타, 마일스 데이비스를 중심으로 한 자유로운 즉흥 연주 등이 어우러졌던 퓨전 재즈 시대를 그리게 한다. 또한 건강 문제로 무대를 떠나기 전 마일스 데이비스가 얼마나 치열하고 뜨거운 연주를 펼쳤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이제는 퓨전 재즈를 단순한 상업적 무드 음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음악이 얼마나 창의적이고 새로웠는지 깨닫게 해준다. 실제 이들 곡들은 1970년대가 아닌 최근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현대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로버트 글래스퍼와 돈 치들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을 정리하는 차원보다는 영화적인 관점에서 이들 곡들을 선곡한 것 같다. 즉, 영화 속 장면 장면에 어울리는 것을 우선으로 선곡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적어도 퓨전 재즈 시대의 시작을 선언한 앨범 <Bitches Brews>(1969)에서 한 곡 정도는 선곡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직 국내에 영화가 개봉되지 않은 만큼 사운드트랙을 먼저 듣는 감상자들은 이들 곡들을 통해 영화의 분위기를 상상하면 색다른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중간 중간 마일스 데이비스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완벽히 재현한 돈 치들의 짧은 대사가 삽입되어 있어 더욱 상상이 재미있을 것이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황금기에 대한 희미한 조명
한편 돈 치들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암흑기로 시대를 국한했지만 마일스 데이비스가 지닌 재즈의 선구자로서의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재즈계를 떠나 칩거하던 마일스 데이비스가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을 넣고 퓨전 재즈 이전 시기의 음악을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했다. 그 결과 <Blue Haze>(1956)의 수록 곡으로 영화의 제목을 제공한 “Miles Ahead”를 비롯해 재즈사의 명반으로 남아 있는 <Kind Of Blue>(1959)에 수록된 “So What”, 길 에반스와 함께 했던 <Sketches Of Spain>(1960)에 수록된 “Solea”, <Seven Steps To Heaven>(1963)의 타이틀 곡, 마일스 데이비스 2기 쿼텟의 명반 <Nerfertiti>(1968)의 타이틀 곡 등이 선곡되었다.
이들 곡들은 비밥, 모달 재즈, 하드 밥, 서드 스트림, 포스트 밥 등을 개척한 마일스 데이비스의 선구자적인 부분을 확인하게 해준다. 그래서 마일스 데이비스의 암흑기에 집중되었지만 희미하게나마 재즈의 왕의 음악적인 위대함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영화를 위한 창작 곡들
한편 영화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곡 외에 5곡의 창작곡이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피아노 연주자 테일러 에익스티가 만든 “Taylor Made”와 로버트 글래스퍼가 만든 “Francessence”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첫 번째 아내 프랜시스 테일러를 위한 곡이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1961년도 앨범 <Someday My Prince Will Come>의 커버에 그녀의 사진을 사용할 정도로 프랜시스 테일러를 사랑했다. 테일러 에익스티와 로버트 글래스퍼의 곡 모두 이러한 마일스 데이비스의 사랑을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사랑스럽고 포근한 분위기를 들려준다.
나머지 세 곡“Junior’s Jam”, “What’s Wrong With That?”, “Gone 2015”는 모두 마일스 데이비스의 미공개 트랙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그의 퓨전 재즈 시대의 어법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 가운데 로버트 글래스퍼 외에 키온 해롤드(트럼펫), 마커스 스트릭랜드(색소폰), 버니스 얼 트래비스(베이스), 켄드릭 스콧(드럼) 등 떠오르는 연주자들이 참여한“Junior’s Jam”은 칩거에 들어가기 전 치열했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일렉트릭 시절을 완벽하게 재현해 보여준다.
“What’s Wrong With That?”은 다시 돌아온 마일스 데이비스의 라이브 장면을 위한 곡이다. 이를 위해 로버트 글래스퍼, 티온 해롤드 외에 허비 행콕(키보드), 웨인 쇼터(색소폰) 등 마일스 데이비스와 깊은 인연이 있는 거장, 그리고 에스페란자 스팔딩(베이스), 개리 클락 주니어(기타), 안토니오 산체스(드럼)가 함께 했는데 펑키하면서 팝적인 사운드가 마일스 데이비스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이 시절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했던 마커스 밀러, 빌 에반스(색소폰), 마이크 스턴, 알 포스터 등의 연주자들은 이 곡을 듣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특히 키온 해롤드의 뮤트 트럼펫 연주는 톤이나 솔로 모두에서 마일스 데이비스를 완벽히 느끼게 해준다. (영화에서는 돈 치들이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완벽히 연기했다.)
끝으로 파로아 몽크의 랩과 힙합 리듬에 샘플링 된 브라스 섹션, 그리고 키온 해롤드의 마일스 데이비스 스타일의 뮤트 트럼펫 연주가 어우러진 “Gone 2015”는 마일스 데이비스 사후에 유작으로 발매된 앨범 <Doo Bop>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영화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암흑기를 다루고 있는 것에 불만을 느낄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등이 등장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나 또한 조금은 아쉬움을 느낀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나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삶을 다룬 유일한 영화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흔히 어르신들이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열 권을 넘을 것”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마일스 데이비스의 삶 또한 한편의 영화로 끝내기엔 너무나 파란만장 하다. 이를 시작으로 마일스 데이비스의 다른 시기를 조명한 영화들이 나올 것이라 확신한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1기 퀸텟 시절, <Kind Of Blue>를 만들던 무렵, 찰리 파커와 활동하던 시절 등 영화가 될만한 부분은 많다. 그 전에 먼저 <Miles Ahead>를 통해 마일스 데이비스의 암흑기, 말년의 시기를 확인하고 그의 음악을 들어보자. 늘 앞으로 나아갔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삶을 거꾸로 끝에서부터 확인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