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는 늘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음악이다. 그 새로운 추진력은 종종 다른 장르의 음악과의 결합을 통해 형성되곤 한다. 과거 재즈가 다양한 문화의 결합을 통해 형성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특히 요즈음 재즈 연주자들은 재즈 외에 팝, 클래식, 록, 민속 음악 등 다양한 음악을 들으며 성장한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재즈를 만들어 내곤 한다.
1990년대 후반,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 일렉트로 재즈도 그런 경우였다. 에릭 트뤼파즈, 부게 베셀토프트, 아몬 토빈, 생 제르맹, 닐스 페터 몰배 등의 연주자들은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재즈와 모든 것을 규칙 속에 가두려는 듯 강박적인 전자 리듬의 결합을 통해 신선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기대만큼의 긍정적 결과는 많지 않았다. 재즈 연주자들은 이내 전자적 질감을 포기했고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바탕을 둔 DJ들은 재즈를 사운드의 맛을 더하는 양념 정도로만 처리했다. 실질적인 결합에 실패했다고 할까?
그래도 몇몇 연주자들은 성공적인 음악을 만들어 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스웨덴의 에스뵤른 스벤슨 트리오(E.S.T)였다. 이 트리오는 리더인 피아노 연주자가 2008년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재즈에 방점을 두고 전자 음악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매우 완성도 높은 음악을 선보였다. 그래서 많은 동료 및 후배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E.S.T만큼의 창의적이며 감동적인 음악을 들려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 아류 연주자들은 갈수록 전자 악기에 매몰되는 경향까지 보였다.
피아노 연주자 크리스 일링워스, 베이스 연주자 닉 블랙카, 드럼 연주자 롭 터너로 이루어진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고고 펭귄도 일렉트로 재즈와 E.S.T의 영향권 안에 있는 음악을 추구하는 들려준다. 피아노 트리오이다. 전자적 질감으로 프로그래밍 이상의 정확한 움직임을 보이는 리듬, 서정과 긴장이 어우러진 멜로디를 뿜어 내는 피아노, 상승과 하강을 조율하며 사운드를 두텁게 만드는 베이스, 그리고 이 모두가 어우러진 우주적인 사운드는 여러 면에서 E.S.T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충분하다. 하지만 이것은 사운드의 질감 부분에 해당되는 것일 뿐이다. 과거 비밥 스타일의 연주가 기본적으로는 유사한 질감을 지녔었던 것처럼, 그럼에도 실력 있는 연주자는 그 공통의 재료에서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 내었던 것처럼 고고 펭귄 또한 그들만의 상상력으로 감상자에게 새로운 감상의 쾌감을 선사한다. 그 결과 지난 2014년에 발매된 트리오의 두 번째 앨범 <V2,0>은 모국 영국을 중심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그 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제작된 앨범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머큐리 상의 12 후보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나 또한 <V2.0>을 통해 고고 펭귄을 알게 되었고 이 트리오가 앞으로 크게 성장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음악보다는 유통의 문제로 인해 영국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기 까지는 조금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블루 노트 레이블의 제작자 돈 워스가 이 트리오를 발견한 것이다. <V2.0>을 듣고 그들의 공연을 본 제작자는 단번에 트리오와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곧바로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 <Man Made Objet>의 제작에 들어갔다.
블루 노트에서의 이번 첫 앨범에서 고고 펭귄은 이전 앨범보다 더욱 이상적으로 재즈와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결합한 음악을 선보인다.이것은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첫 곡으로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All Res”부터 잘 드러난다. 필립 글래스를 연상시키는 미니멀한 크리스 일링워스의 피아노 연주와 미디로 찍어낸 듯 정확하고 반복적인 리듬을 이어가는 드럼이 공상과학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될 법한 우주적인 감각을 연출한다.
단순한 멜로디 패턴을 반복하고 그 층을 계속 쌓아가며 상승하는 피아노가 일렉트로니카 음악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그 뒤로 베이스와 드럼이 강박적인 리듬을 연주하며 몰아의 경지로 상승하고 급격히 추락하는 “Branches Break”이나 “Weird Cat”, “Smaara” 같은 곡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리더로 작곡과 연주 모두에 있어 균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세 연주자는 일렉트로니카 음악적 질감을 시종일관 유지한다. 실제 트리오는 컴퓨터 미디 프로그램으로 곡을 쓴다고 한다. 컴퓨터에서 원하는 사운드를 먼저 만들고 이를 트리오 연주로 실현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트리오가 재즈가 아닌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트리오의 연주를 다시 들어보기 바란다. 질감은 전자적이지만 실제로는 전자 악기가 사용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힌두교의 잠자는 악마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Smaara”에서 신디사이저 같은 질감의 건반 연주가 나오지만 이 또한 피아노 현에 키친 타월을 올려놓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후반부의 산화(散華)의 느낌을 주는 포화된 사운드 또한 믿기지 않지만 어쿠스틱 악기를 바탕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E.S.T도 종종 유사한 사운드를 연출하곤 했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 “인간이 만든 사물”는 이러한 전자 악기 없는 일렉트로 재즈를 추구하는 트리오의 이상을 설명한다. 트리오는 기계가 사람과 하나되어 인간화 되는 것에서 이번 앨범의 타이틀을 생각했다고 한다. 분명 의수나 의족이 기계적인 것이지만 사람의 몸에 동화되어 사람 스스로 진짜라 착각할 정도로 실제의 팔다리처럼 움직이게 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인간화된 기계라 할까?
따라서 이번 앨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일렉트로니카 음악 같은 트리오의 기계적인 연주가 아니라 일렉트로니카를 수용하면서도 그 안에서 끝까지 유지하는 역동적 자유에 있다. 분명 일렉트로니카 스타일의 질감은 매력적이다. 재즈 외에 팝 등의 음악을 들으며 성장한 요즈음의 젊은 음악 감상자를 사로잡을 만하다. 하지만 재즈가 스윙하는 리듬이나 빠른 연주가 아니라 그 안에 연주자의 정서적인 부분이 담겨 있을 때 온전한 매력을 발산하듯 고고 펭귄 또한 일렉트로니카적인 사운드 안에 담긴 감성적인 연주로 E.S.T는 물론 이 시대의 다른 트리오와 다른 독자적 개성을 지닌 트리오로 생각하게 만든다. “Quiet Mind”에서 밝은 분위기의 패턴을 반복하는 피아노 뒤로 잠시 등장하는 닉 블락카의 베이스 솔로, “Gbfisysih”에서 클래식적인 맛까지 느끼게 해주는 크리스 일링워스의 서정적인 솔로 등이 좋은 예이다.
이 외의 곡들에서도 역시 정서적인 매력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것이 주로 슬픔과 연결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꼭 슬픈 멜로디를 연주해서가 아니다. 단속적인 리듬 위로 재즈와 클래식에 기반을 둔 긴장과 서정이 어우러진 피아노 연주간의 대비에서 다소 어두운 낭만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피가 낭자하는 잔인한 싸움 장면에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 비극성을 강조하곤 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생각하면 좋겠다. 아니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기계만큼이나 하루 하루를 큰 변화 없이 반복적으로 보내지만 실은 그 안에 표현하지 못한 고독, 우수로 가득한 우리네 삶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바로 이 부분이 나는 고고 펭귄이 기계를 지향하는 사람의 음악이 아니라 기계를 만들고 자유로이 활용하는 사람의 음악을 지향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물론 감상자에 따라서는 고고 펭귄의 음악을 재즈 외의 것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래서 블루 노트가 트리오와 계약한 것에-그것도 3장의 앨범을 제작하기로 계약한 것에 불만을 표할 지도 모른다. 그 또한 설득력이 있음을 나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만큼 이 트리오의 음악이 새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트리오 또한 자신들이 전통적인 재즈에서 벗어난 음악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재즈로 인정 받기 위해 전통을 존중하려 하지도 않는다.그래서 나는 이 트리오의 이후가 더 궁금하다. 결국 그것이 재즈의 외연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충분히 트리오는 그럴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번 앨범이 그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