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스 데이비스 : 앨범으로 정리한 그의 삶
현재 재즈는 서로 양립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스타일로 세분화 되어 있다. 그만큼 개성 있는 음악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감상자 입장에서는 혼란스럽다. 이러한 혼란은 1990년대 이후 더욱 심화된 듯하다. 그러면서 갈수록 재즈는 대중 음악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그래도 다양한 스타일의 재즈 가운데 중심을 잡아주는 주도적인 재즈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재즈는 대중 음악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의 근원에는 1991년 9월 28일에 일어난 마일스 데이비스의 사망이 자리잡고 있지 않나 싶다. 비밥 시대 이후 전개된 재즈의 역사에는 늘 그가 중심에 있었다. 연주자들은 그가 제시하는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삶, 그의 음악적 변화가 그대로 재즈의 역사였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따라서 그의 사망은 재즈의 중심이 와해되는 것에 버금갈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실제 그의 사망 이후 그의 후예라 불릴 인물은 많지만 그에 버금가는 강렬한 지배력을 지닌 인물은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그는 산 사마중달을 내쫓은 죽은 제갈공명처럼 현대 재즈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지금도 의미 있는 일이다.
1926년.
전체 이름이 마일스 듀이 데이비스 3세인 그는 1926년 5월 26일 일리노이주 앨튼시에서 치과의사였던 마일스 듀이 데이비스 2세와 클레오타 매 데이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듬해 가족 전체가 동 세인트 루이스로 이사해 그 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39년
13세 생일이 되던 날 마일스 데이비스는 아버지로부터 트럼펫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전문 연주자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엘우드 부캐넌과 세인트루이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트럼펫 연주자였던 조셉 구스타트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조셉 구스타트는 당시의 유행과는 달리 비브라토를 절제하도록 가르쳤는데 이로 인해 마일스 데이비스는 다른 재즈 트럼펫 연주자들과 다른 담담한 듯하면서도 서정적인 톤을 가질 수 있었다.
1944년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마일스 데이비스는 지역의 여러 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펼쳤다. 그런 중 빌리 엑스타인 밴드에서 병에 걸린 트럼펫 연주자를 대신해 연주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밴드에는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와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도 소속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연주는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찰리 파커는 연주 후 그에게 뉴욕에 오면 한번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에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줄리어드 음대에서 공부하기 위해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52번가의 재즈 클럽을 돌며 색소폰 연주자를 만나려 했다.
1945년
1945년 4월 19세의 나이로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첫 녹음 기회가 찾아왔다. 색소폰 연주자 허비 필드가 이끄는 밴드의 일원으로 보컬 러버렉스 윌리엄스의 앨범을 녹음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줄리어드 음대를 휴학하고 디지 길레스피를 대신해 찰리 파커의 퀸텟의 트럼펫 연주자가 되었다. 그리고 11월 26일 처음으로 찰리 파커와 함께 앨범을 녹음하게 되었다. 이 두 녹음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은 1990년에 발매된 <First Miles>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49년
찰리 파커 그룹 생활은 마냥 행복하지 않았다. 마약에 빠진 색소폰 연주자는 기행을 일삼으며 공연에 소홀하곤 했으며 수익을 제대로 멤버들에게 나누어주지도 못했다. 그 결과 1948년 디지 길레스피가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마약에 빠져 허우적대는 찰리 파커를 떠났다.
그 무렵 마일스 데이비스는 클로드 손힐 오케스트라에서 편곡을 담당하던 길 에반스를 알게 되었다. 당시 트럼펫 연주자는 자신만의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이에 길 에반스는 최적의 파트너였다. 그 결과 마일스 데이비스는 프렌치 혼, 튜바 등이 포함된 조금은 색다른 9인조 밴드를 결성해 1949년 1월, 4월 그리고 1950년 5월 세 차례에 걸쳐 녹음을 했다. 제리 멀리건, 존 루이스, 건서 쉴러, 케니 클락 등이 함께 한 밴드는 당시의 비밥을 뛰어넘는 새로운 분위기의 연주를 펼쳤다. 정교하고 복잡한 편곡 위에 비밥과는 대조되는 부드럽고 조용한 솔로가 흐르는 연주였다. 그것이 바로 쿨 재즈였다. 하지만 이 녹음은 곧바로 앨범으로 발매되지 못했다. 1957년에서야 < Birth of the Cool>(1957)이란 타이틀로 발매될 수 있었다.
1954년
많은 재즈 연주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일스 데이비스 또한 마약에 중독되어 어려운 시기를 보
내야 했다. 그 결과 1951년 색소폰 연주자 소니 롤린스, 재키 맥린과 함께 앨범 <Dig>을 녹음하기도 했지만 1953년까지 공백기를 가지며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후 1954년 4월 럭키 톰슨, J.J 존슨, 호레이스 실버 등의 연주자들과 함께 앨범 <Walkin’>을 녹음했다. 앨범에서 그는 블루스와 펑키한 감각을 더 강조한 연주로 보다 흑인적인 것을 강조했던 하드 밥의 시작을 알렸다.
1956년
1954년부터 마일스 데이비스는 프레스티지 레이블을 통해 <Bags’ Groove>, < Miles Davis And The Modern Jazz Giants>, <The Musings Of Miles>, <blue Moods> 등 일련의 뛰어난 앨범들을 녹음했다. 그와 함께 비교적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음악적 성장을 함께 할 밴드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이에 수개월 동안 이상적인 동료를 찾은 끝에 존 콜트레인(색소폰), 레드 갈란드(피아노), 폴 체임버스(베이스), 필리 조 존스(드럼)가 함께 한 퀸텟을 결성했다.
앨범 제작 환경이 좋은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앨범을 녹음하고픈 마음도 커져갔다. 그 결과 1955년 아직 프레스티지 레이블과의 계약이 남은 상태에서 콜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단행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콜럼비아 스튜디오에서 한 곡을 녹음했다. 그리고 1956년 6월과 9월에 녹음을 더 해 앨범 한 장을 완성했다. 그것이 바로 1957년에 발매된 앨범 <Round Midnight>이었다.
이 앨범은 퀸텟의 첫 앨범이자 최고의 앨범이 되었다. 앨범의 수록 곡들은 마치 퀸텟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이것은 퀸텟이 그들만의 거대한 아우라를 완성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 마일스 데이비스는 고독을 즐기려는 듯 고고한 자세로 차가움과 뜨거움의 어느 중간 지점에 머무르는 듯한 그만의 사운드를 연주했다.
한편 마일스 데이비스는 프레스티지 레이블과의 남은 4장의 앨범 계약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래서 <Round Midnight>의 녹음과 병행해 1956년 5월과 11월에 각 하루씩 총 이틀에 걸쳐 4장 분량의 곡들을 녹음했다. 마라톤 세션이라 불린 이 녹음은 <Cookin’>, <Relaxin’>, <Steamin’>, <Workin’>으로 나뉘어 1956년부터 1961년 사이에 발매되었다. 견고하면서도 유연한 리듬 섹션 위를 흐르는 강하고 뜨거운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과 마일스 데이비스의 여린 뮤트 트럼펫의 조화는 그룹을 “The Quintet”이라 부를 정도로 퀸텟의 모범과도 같았다.
1957년
너무나도 완벽한 조화를 이룬 퀸텟이었지만 그 역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존 콜트레인을 비롯한 다른 연주자들의 약물 문제 때문이었다. 결국 밴드를 해산하고 마일스 데이비스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루이 말 감독의 영화 <Ascenseur Pour l’Echafaud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사운드트랙을 녹음했다. 녹음은 4시간에 걸쳐 감독이 고른 음악이 필요한 장면 앞에서 펼친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는 흑백 영화의 분위기에 잘 녹아 들었다.
1958년
약물 중독으로 문제가 있었던 존 콜트레인이 회복되자 마일스 데이비스는 다시 퀸텟을 복원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색소폰 연주자 캐논볼 아들레이를 추가해 섹스텟으로 그룹의 규모를 키웠다. 이 친근하면서 새로운 그룹은 1958년 3월 새로운 앨범 <Milestones>를 녹음했다. 앨범에서 그룹은 ‘Straight, No Chaser’로 대표되는 뜨거운 연주로 하드 밥의 극한을 보여주는 한편 타이틀 곡을 통해서는 모달 재즈의 단초를 보여주었다.
한편 <Milestones>의 녹음을 마무리하고 5일 뒤에 마일스 데이비스는 캐논볼 아들레이의 앨범 <Somethin’ Else> 녹음에 사이드 맨으로 참여해 “Autumn Leaves”의 재즈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버전을 연주했다. (한편 마일스 데이비스가 블루 노트 라벨에서 녹음하기 위해 캐논볼 아들레이를 앞에 내세웠다는 설도 있다.)
1959년
앨범 <Milestones>을 녹음 한 뒤에 마일스 데이비스의 그룹은 다시 와해되었다. 필리 조 존스와 레드 갈란드가 떠났고 빈자리를 지미 콥과 빌 에반스가 메웠다. 이 두 명의 새 멤버와 함께 트럼펫 연주자는 1959년 재즈 역사상 최고의 음반을 녹음했다. 이틀에 걸쳐 녹음된 6곡에서 그룹은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균형을 보였다. 동시에 “So What”등의 곡을 통해 한 해 전 <Milestones>에서 탐구했던 모달 재즈의 가능성을 제대로 구현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도 신선하고 매혹적인 면을 잃지 않고 재즈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무인도에 가져갈 유일한 재즈 앨범으로서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한편 앨범 <Birth Of The Cool> 이후에도 마일스 데이비스는 길 에반스와 함께 빅 밴드 앨범을 꾸준히 이어갔다. 1959년에도 <Miles Ahead>(1957), <Porgy & Bess>(1958)에 이어 앨범 <Sketches Of Spain>을 녹음했다. 이 앨범에서 트럼펫 연주자는 스페인의 클래식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즈 협주곡”을 극적인 긴장 속에 노래하듯 연주해 악보 중심의 클래식과 즉흥 연주 중심의 재즈의 이상적인 어울림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또한 쿨 재즈를 넘어 그 무렵 등장한 “서드 스트림”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1961년
<Kind Of Blue>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룹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다시 멤버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런 중 1961년 3월 마일스 데이비스는 그와 함께 했던 윈튼 켈리, 폴 체임버스, 지미 콥, 그리고 1960년 12월부터 함께 한 행크 모블리와 퀸텟을 이루어 하드 밥 스타일의 앨범 <Someday My Prince Will Come>을 녹음했다. 하지만 퀸텟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사랑스러운 분위기의 앨범 타이틀 곡 등 두 곡에서는 다시 한번 존 콜트레인을 불러 섹스텟 편성으로 녹음했다. 이것은 존 콜트레인과의 마지막 녹음이었다.
1965년
마일스 데이비스는 행크 모블리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함께 했던 리듬 섹션연주자들도 각자의 길을 위해 그를 떠났다. 그 결과 1962년 그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새로운 그룹을 결성하기 위해 여러 연주자들을 만났다. 그 결과 웨인 쇼터(색소폰), 허비 행콕(피아노), 론 카터(베이스), 토니 윌리엄스(드럼)으로 이루어진 퀸텟을 결성하게 되었다.
새로운 퀸텟은 1965년 1월 앨범 <E.S.P>를 녹음했다. 트럼펫 연주자는 물론 다른 멤버들의 자작곡으로만 채워진 앨범이었다. 이 앨범에서 퀸텟은 추상적이고 현대적인 분위기의 연주를 펼쳤다. 하드 밥보다는 한참 후 등장할 포스트 밥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연주였다.
<Miles Smile>(1966), <Sorcerer>, <Nefertiti> (1967) 등 앨범을 거듭할수록 두 번째 퀸텟의 음악은 더욱 깊어졌다. 다섯 연주자들은 다채로이 변화를 거듭하는 리듬과 극한을 향하는 솔로 연주를 펼쳤다. 그들의 연주는 새롭고 자유로웠다. 그러면서도 당시 재즈계를 휩쓸고 있던 프리 재즈와는 다른 새로움과 자유였다.
1968년
마일스 데이비스는 재즈가 갈수록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했다. 당시 대중 음악의 중심은 록이었고 록의 중심에는 일렉트릭 기타가 자리잡고 있었다. 트럼펫 연주자는 특히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연주, 슬라이 스톤의 펑키함, 그레이트풀 데드의 사이키델릭한 사운드에 매료되었다. 허비 행콕 또한 전자 악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1968년 한 해에 두 장의 앨범 <Miles In The Sky>와 <Filles de Kilimanjaro>을 녹음하면서 일렉트릭 피아노와 일렉트릭 베이스, 일렉트릭 기타 등을 사용해 기존과는 다른 질감의 사운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두 번째 퀸텟의 마지막 앨범이 된 <Filles de Kilimanjaro>에서는 기존 퀸텟에 칙 코리아(피아노, 일렉트릭 피아노)와 데이브 홀랜드(베이스)를 참여시켜 전자적인 동시에 한층 진보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사운드로 앞으로 다가올 변화를 예고했다.
1969년
두 번째 퀸텟을 해산하고 마일스 데이비스는 갈수록 록적인 질감의 새로운 재즈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실은 1969년 2월 두 대의 일렉트릭 피아노, 오르간, 일렉트릭 기타 등으로 이루어진 옥텟 편성의 앨범 <In A Silent Way>에 이어 8월에 녹음된 앨범 <Bitches Brew>를 통해 결실을 맺었다.
앨범에서 그는 기존의 웨인 쇼터, 칙 코리아 그리고 조 자비눌 외에 존 맥러플린, 빌리 코브햄, 레니 화이트, 잭 드조넷, 데이브 홀랜드 등 향수 재즈계의 주인이 될 연주자들과 함께 록의 질감과 프리 재즈적인 집단 연주를 가미한 새로운 차원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록의 매력을 재즈로 끌어온 그 연주는 퓨전 재즈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1981년
<Bitches Brew> 이후 그는 <Jack Johnson>, <Live/Evil>(1971), <On The Corner>(1972), <Big Fun>, <Get Up With It>(1974) 등의 앨범을 통해 퓨전 재즈의 성공을 이어갔다. 하지만 약물 중독으로 인한 건강 문제가 다시 한번 그를 재즈계에서 물러서게 했다.
약 5년간 그는 활동을 멈추어야 했다. 하지만 1981년 앨범 <The Man With The Horn>으로 다시 건재를 알리며 복귀했다. 당시 트럼펫 연주자 윈튼 마샬리스가 중심이 된 신 전통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는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새로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앨범에서 그는 70년대 퓨전 재즈를 이어가면서도 팝적인 면을 수용한 간결하고 단순해진 사운드의 음악을 선보였다.
1985년
복귀 후 마일스 데이비스는 <Star People>(1983), <Decoy>(1984) 등의 앨범을 통해 계속 창조적인 음악을 이어갔다. 특히 1984년 1월부터 1985년 1월 사이에 녹음된 앨범 <You’re Under Arrest>는 70년대의 퓨전 재즈를 계승하면서도 보다 팝적인 색채가 강화된 사운드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특히 신디 로퍼의 “Time After Time”과 마이클 잭슨의 “Human Nature”를 녹음한 것은 그가 재즈에서 멀어진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많은 공연에서 이 두 곡을 꾸준히 연주하며 자신의 후기를 대표하는 곡으로 만들었다.
1991년
<You’re Under Arrest> 이후 마일스 데이비스는 <Tutu>(1986), <Amandla>(1989), <Aura> 등의 앨범을 통해 80년대에 어울리는 퓨전 재즈를 이어갔다. 윈튼 마샬리스를 비롯한 전통주의자들의 부정적 시선은 그에게 소용 없었다. 오히려 <마이애미 바이스>, <크라임 스토리> 등의 TV 시리즈와 영화 <Dingo>에 출연하는 등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강화시키기도 했다.
한편 1980년대 후반부터 그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졌다. 병원에 입원하고 공연을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중 1991년 9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했다가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끝에 9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그의 나이 65세였다.
1992년
마일스 데이비스가 세상을 떠난 후 유작 앨범 <Doo Bop>이 발매되었다. 1991년 1월과 2월에 걸쳐 녹음된 앨범에서 트럼펫 연주자는 리듬을 프로그래밍으로 대체하고 이지 모 비 등의 래퍼를 통해 당시 유행하고 있던 힙합을 수용한 음악을 시도했다. 이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당대의 흐름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길을 찾으려 했음을, 영원한 개척자였음을 새삼 확인하게 해주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마일스 데이비스는 늘 새로운 곳을 바라본 연주자였다. 그리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지만 새로운 음악이 혼자만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았던 연주자이기도 했다. 음악적 목표에 맞는 실력자라면 유명세와 상관 없이 누구라도 기용할 수 있는 현명한 리더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만든 새로운 재즈로 감상자를 매혹시킬 수 있는 대중적인 연주자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연주자와 감상자 모두에게 있어 재즈의 리더였다. 재즈가 갈수록 대중 음악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시대를 아우르고 이끄는 새로운 리더가 없는 지금 새삼 그가 그리워진다.
아.. 대단한 뮤지션이라고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정리해주시니 훨씬 와닿네요.
개인적으론 포스팅의 연대기로 따지면.. 60년대 말 70년대 앨범들에 흥미가 당깁니다.
지금 ‘The Man with the Horn ‘앨범 듣고 있는데, 헐..대박입니다(다른 멋진 표현을 쓰고 싶었습니다만…ㅜ)! 소름이 막 돋네요.
말씀하신 시기가 퓨전 재즈 시기인데 생각보다 쉽게 듣기 어려운 음악들입니다.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반면 휴식을 마치고 복귀하며 발표한 The Man with the Horn같은 앨범들은 상대적으로 듣기 부담이 없죠. 게다가 지금의 음악을 예견한 것 같아 놀랍기까지 합니다. ㅎㅎ
예..완전 동의합니다~
Filles de Kilimanjaro랑 Miles in the Sky 듣고 나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것 같아요.^^
모든 앨범을 들어본 건 아니지만, 리듬감이 정말 남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들었을때는 몰랐는데, 가만히 집중해서 들으면 리듬이 뭔가가.. 착~ 감긴다고 해야하나요..그루브를 느낄 수 있는 곡도 있고요..
이렇게 좋은 앨범들 일목요연하게 소개해주셔서 엄청 감사할 뿐입니다~!
지금 등장한 재즈의 상당수가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리듬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ㅎ 마침 제가 라이너 노트를 쓴 마일스 데이비스 콜럼비아 베스트 앨범 King Of Jazz가 나왔으니 들어보시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