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ve Eliovson – Venice

오랜 만에 꿈을 꾸었다. 흔히 말하는 아무 의미 없는 개꿈일 게다. 하지만 그 내용이 좀 흥미롭다. 꿈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나뉜다.

1. 먼저 읽어보지도 못한,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작가의 소설에 관한 꿈이다. 교보문고나 다른 종로의 서점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서점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초록색과 흰색이 책을 가로로 양분한 디자인에 검은 글씨로 “달려서 산을 오르는 남자”란 제목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작가는 일본작가였는데 이름이 조금 어려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글자 수로 아홉 자 정도 된 듯한데 “~토 ~치”로 이루어진 이름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나도 잘 모르겠다. 읽었던 책이 아니니까. 다만 책을 만질 때 누군가 지나가며 ‘저 소설 읽어봤냐? 정말 산을 달려서 오르는 남자 이야기인데 달리는 부분은 참 재미있어. 그런데 쉴 때는 재미없어. 그리고 마지막은 허무해”라고 일행에게 설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깨어 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최근 민음사의 오랜 시집을 보고 책 디자인을 생각했을 것이고 등산을 했기에 그런 내용의 소설을 생각했을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괜히 그 일본 소설 작가가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편으로는 영감이란 것이 정말 있음을 생각했다. 꿈 속의 소설은 분명 내 무의식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나는 저 꿈속의 소설을 완성해야만 하는 것일까? 달릴 때는 재미있게 쉴 때는 재미 없게 끝은 허무하게?

2. 두 번째는 종로의 어느 음반 매장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매장 중의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매장에서 박스 세트 앨범을 염가로 팔고 있었다. 그것도 한번도 본적이 없는 특이한 박스 세트 앨범들이었다. 폴 매카트니 전집이 LP 사이즈 주황색 박스에 담겨 아이돌 앨범처럼 마구잡이로 팔리고 있었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록 그룹 레어 어스 전집이 해체되어 앨범 단위로 진열되어 있었다. 참고로 난 이 그룹의 앨범은 <Get Ready>와 <Back To Earth> 앨범 밖에 모른다. 그런데 한번도 보지도 못했던 앨범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들 박스 세트는 탐나지 않았다. 화사한 박스 세트들 사이에 딱 하나 남아 있던 건조한 회색 박스에 담겨 있는 ECM 박스 세트가 탐났다. 이 세트 앨범의 타이틀은 “Trace Of Nothing”이었다. 주제에 맞게 ECM의 제작자 맨프레드 아이허가 선곡한 곡들을 모아 놓은 앨범 10장으로 이루어진 박스 세트였는데 DVD 사이즈로 되어 있었다. 어떤 곡들이 담겨 있었는지는 다 보지 못했다. 독일 출신의 베이스 연주자 아델하르트 로이딩거의 “Loveland”와 남아프리카 출신의 기타 연주자 스티브 엘리오브슨의 “Venice”가 이어서 선곡되었던 것만 기억날 뿐이다. 이 두 연주자의 앨범을 들어본 지도 매우 오래되었는데 어째서 꿈에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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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신기한 것은 이 박스 세트가 두 번째라는 것이다. 즉, “Trace Of Nothing 2”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박스 세트가 있었다는 것인데 주인은 다 팔리고 없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첫 번째 박스 세트는 잘 알려진 곡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먼저 다 팔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델하르트 로이딩거와 스티브 엘리오브슨의 앨범이 1980년대 초에 발매된 것이었으니 첫 번째 박스 세트는 그 이전 1969년부터 1979년사이의 10년 사이에 제작된 앨범들 중에서 고른 음악들로 채워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1970년대 ECM은 곡 단위로 선곡해 10장의 편집 앨범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앨범을 제작하지 않았기에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박스 세트 앨범을 나는 살 수 없었다. 나보다 한발 앞서온 다른 사람이 이 박스 세트를 집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집는 순간 내게서 세트를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보통 환상 영화를 보면 아침에 일어나 꿈인가 싶었는데 머리맡에 꿈이 아님을 증명하는 물건들이 놓여 있곤 한다. 내게는 그런 환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 그 책과 박스 세트를 기다리며 살아야 할 뿐이다.

참고로 스티브 엘리오브슨의 <Dawn Dance>앨범에 수록된 “Venice”를 소개한다.

이어서 아델하르트 로이딩거의 앨범 <Schattseite>에 수록된 “Loveland”도 링크한다

4 COMMENTS

  1. 혹시 포스팅을 위한 글 말고 책을 출판하기 위해 글을 쓰고 계시는지..?
    마치 꿈 일기를 쓰시는 것 처럼, 꿈 내용을 이렇게나 세밀하게 묘사하신 게 저에겐 오히려 더 신기하게(?) 보입니다.^^
    꿈 내용이 욕망의 무의식적 발현인지, 아니면 미래의 일을 예지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첫번째 꿈내용이 흥미롭네요.

    두 곡 다 좋지만, ‘loveland’곡…오묘합니다.

    • 글이 모이면 책이 나오겠죠? 꿈 일기는 쓰지 않습니다. 쓰려면 꿈을 계속 꾸어야 하는데….사실 “나는 날마다 꿈을 꾼다”가 나름 제 머릿말이긴 한데 피곤한지 꿈이 잘 아꿔집니다.ㅎㅎ 판타지 소설이나 써볼까요? 꿈 속의 세계에 관해? ㅎ

    • ^^ 어디선가 들은 것같은데.. 사람은 잘 때 늘 꿈을 꾼다고 하더라고요. 단지 기억을 하지 못할 뿐..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 정신역동쪽 전문가들은 수련기간동안 자신의 무의식을 분석하기 위해 일정기간동안 꿈일기를 써서 분석하기도 합니다. 꿈일기를 쓰기시작하면서 꿈내용을 더 잘기억하는 분들이 많고요.

      낯선청춘님의 판타지 소설이라..쓰시길 적극 추천합니다!
      혹시 제목이 ‘날마다 꿈꾸는 남자’?ㅋ ‘꿈꾸는 부분은 참 재미있고, 꿈을 깬 현실은 재미가 없고, 마지막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허무하게 되는…??’ ^^

    • 예. 저도 들었습니다. 다만 기억을 못할 뿐이라고 하더군요. 판타지 소설은 “날마다 꿈꾸는 남자”가 더 졸을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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