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지만 비관적이지 않은 세계로 감상자를 이끄는 앨범
2000년 당시 파리에서 살고 있던 나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프랑스 가수 앙리 살바도르가 “Le Jardin D’hiver 겨울의 정원”을 처음 들었을 때 당시 80을 훌쩍 넘은 노장이 떠난 사랑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설득력 있게 부를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고 감동했다. 삶의 겨울 속에서 그는 봄처럼 화사하고 여름처럼 뜨거운 사랑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그리움은 결코 우울하고 슬프지 않았다. 떠나감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랑까지는 몰라도 겨울의 낭만을 찾아내 즐기는 여우가 있었다. (이것은 뮤직 비디오를 보면 더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파리의 춥고 어두운 개인 스튜디오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이토록 우울을 달콤하게 표현한 곡을 누가 썼을까 궁금해했다.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풀렸다. 나처럼 앙리 살바도르의 노래뿐만 아니라 작곡자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많았었는지 한 프랑스 방송에서 작곡자를 조명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케렌 안. 유대계 혈통으로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태어나 네덜란드를 거쳐 11세부터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20대 중반의 젊은 여성이었다. 어떻게 그리 젊은 여성이 삶의 겨울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0년 방송 출연 즈음에 발매된 그녀의 첫 앨범 <La Biographie de Luka Philipsen 루카 필립센 전기(傳記)>을 통해 나는 어둠 속으로 내려가 그 안에서 달콤한 공간을 찾는 것은 그녀의 근본적인 음악적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안개처럼 젖어 드는 스모키 보이스로 그녀는 혼자만의 이야기를 하듯 나지막이 노래했다. 그 노래들은 꿈결같았다. 다소 어둡고 몽환적인 세계를 유영하는 듯 했다.
이러한 그녀의 노래는 이내 프랑스를 넘어 세계 곳곳의 감상자들을 사로잡았다. 2002년 두 번째 앨범 <La Disparition 실종>에 이어 2003년 영어로 노래한 앨범 <Not Going Anywhere>가 세계적 성공을 거둔 것이다. 국내에서도 아마 이 앨범으로 그녀를 알게 된 감상자들이 많을 것이다. 우울과 달콤함을 포크, 록, 팝 등의 사운드를 조합해 표현한 그녀의 음악은 <Nolita>(2004), <Keren Ann>(2007), <101>(2011)로 이어지면서 더욱 깊이를 더해갔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기복제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도 새로운 것이 없으면 새 앨범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앨범 <101>에서 60,70년대 영화에 어울릴 법한 복고적 팝의 느낌이 물씬 나는 음악을 선보인 것이 좋은 예이다. 하지만 그녀가 변화를 위한 변화, 사운드에 우선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보다 그녀는 삶을 살며 이를 바탕으로 음악을 쓰는데 쓰고 나서 그에 어울리는 사운드를 생각하고 여러 곡들이 하나로 귀결된다 싶으면 그 때 앨범 제작에 들어간다. 즉, 곡은 그녀 스스로가 쓰는 것이 맞지만 사운드는 변신보다는 성장의 느낌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스타일에서도 그녀만의 어두우면서도 비관적이지 않은 그녀의 정서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 <You’re Gonna Get Love>는 그녀의 통산 일곱 번째 앨범이자 다섯 번째 영어 앨범이다. 이 앨범에서도 그녀는 채도가 살짝 낮은 느낌의 보컬로 머무르고 싶은 우수(憂愁)어린 노래, 그녀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2011년 이후 약 5년간 기다려왔던 그 음악을 들려준다. 다시 한번 감상자를 고독의 공간으로 몰고 가 현재를 살피고 과거를 추억하게 한다. 그리고 약간의 우수에 젖게 한다.
이를 위해 그녀는 먼저 자신의 경험과 이를 통해 느낀 감정들을 드러낸다. 앨범에서 싱글로 먼저 공개된 “Where Did You Go?”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이 곡은 손녀딸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부재가 주는 슬픔, 허전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어두운 정서는 여름 같았던, 그래서 잊을 수 없는 지난 날의 추억(“The Separated Twin”, “Again & Again”, “You Knew Me Then”), 전장에 아들을 보낸 어머니의 불안(“Bring Back”), 매력적인 나쁜 남자에 대한 사랑(“Easy Money”), 비현실적 사랑의 소망(“Insensible World”), 이제는 접근할 수 없게 되어버린 추억 장소에 대한 향수(“The River That Swallows All The Rivers”)등으로 변주되어 앨범을 떠다닌다. 아련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때로는 꿈결처럼.
이러한 개인적이고 은밀한 이야기 앞에서 그 어느 누가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감상자가 그녀의 노래에 반응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멜로디가 좋아서, 리듬이 좋아서, 연주가 좋아서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그녀의 음악에서 먼지 쌓인 채 잊고 있던 지난 날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향수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하지만 그녀의 음악을 줄곧 들어온 감상자라면 알겠지만 우수 자체는 그녀의 음악적 매력이 아니다. 그녀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로 감상자를 개인적인 공간으로 가라앉게 하지만 그녀의 노래는 눈물을 흘리게 만들지는 않는다. 대신 그 고독과 그리움의 시간에서 다시 힘을 내게 만든다. 특별한 위로의 말보다는 다 이해한다는 듯 옆에 말 없이 있는 친구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이 “Where Did You Go”가 아니라 “You’re Gonna Get Love”인 것도 이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우울하고 슬픈 시간을 지내왔고 어쩌면 그것이 지금도 이어질 지도 모르지만 결국 “당신은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노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녀의 음악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후회하고 아쉬워 하면서도 결국엔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 삶임을 그녀는 음악을 통해 말한다.
사운드의 측면에 있어서는 약간의 변화가 엿보인다. 여전히 포크, 록, 팝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조합하고 있기는 하지만 팝 적인 면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하려는 노력도 보인다. 지난 앨범 <101>의 “My Name Is Trouble”처럼 말이다. 자신의 음악적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앨범의 성공을 위한 대중적인 측면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 같은데 이번 앨범에서는 타이틀 곡이 특히 그렇다. 두툼한 질감의 베이스가 건반이나 기타 이상으로 분위기를 결정하는 중요 역할을 하는 이 곡은 소울의 질감을 많이 가져온 듯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Easy Money”에서도 반복된다. 또한 공간감 강한 기타로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블루지한 감각의“My Man Is Wanted But I Ain’t Gonna Turn Him In”도 표현의 방식에 있어서는 이전 그녀의 음악들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이러한 새로움에는 뱅자맹 비올레(benjamin Biolay)와 초기 프랑스어 앨범을 함께 제작한 이후 혼자 모든 것을 해오던 그녀가 알랭 슈송(Alain Souchon), 에밀 시몽(Émilie Simo), 클레망틴 롬(Clémence Lhomme) 등의 개성 강한 프랑스의 싱어송라이터, 그리고 파이스트(Feist) 등의 앨범을 제작했던 르노 르탕(Renaud Letang)과 손을 잡은 것도 영향을 끼쳤다. 물론 제작자는 포크적 감성이 기본적으로 강했던 기존 케렌 안의 음악을 먼저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비전을 가미했다.
한편 레이블을 옮겨 5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앨범은 플레지 뮤직(Pledge Music)이라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되었다. 상업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얻은 그녀가 제작비가 없어서 펀드를 모은 것은 아니다. 그녀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과 소통하면서 앨범을 만들고 또 그들에게 먼저 음악을 선보이려는 마음에서 이 방식을 사용한 것 같다. 다른 어느 앨범보다 개인적인 음악을 담고 있으면서도 대중적인 색채가 강한 앨범이 만들어진 것도 이 크라우드 펀딩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1974년생이니 어느덧 그녀의 나이도 우리 나이로 43세가 되었다. 20대 중반에 말년의 정서를 매혹적으로 그려냈던 그녀가 이제는 중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이에 걸맞게 그녀의 음악은 깊어졌다. 더 솔직해졌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식으로 과시하고 가르치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그것이 감상자의 가슴 한쪽에 작은 울림을 만들어 내기를 바라면서. 물론 그 바람은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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