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 잔을 걸치고 집에 돌아온 밤.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Insensatez”를 듣는다. 1963년에 발매된 앨범 <The Composer of Desafinado Plays>에 수록된 짧은 연주곡이다. 쇼팽의 “전주곡 4번”과 유사한 멜로디, 슬픔을 머금은 멜로디가 보사노바 리듬위로 흐른다.
이 곡을 들으면 나는 달이 휘영청 뜬 밤을 그리게 된다. 달은 호수 위에 떠 있다. 그리고 그 달을 보는 한 사람. 그는 달빛에 매혹되었다. 그래서 슬프다. 이 멋진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다. 그 사람은 달빛을 보며 탄식에 가까운 한 마디 말을 내 뱉는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혼자인 내게 이 멋진 풍경을 보게 하다니!” 이것은 내 슬픔과 상관 없이 아무일 없다는 듯이 여전히 아름다운 자연의 매정함에 대한 탄식이기도 하다. 낭만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피가 튀는 총격전이 펼쳐지는 영화의 장면에서 느끼게 되는 비장함 같은 것?
그런데 이 곡을 위해 비니시우 지 모라에스가 쓴 가사는 이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가사의 화자는 후회하고 있다. 그 사람이 내게 보여준 사랑을 왜 나는 몰랐던가? 하며 떠난 사랑을 아쉬워한다. 그러니까 내 상상과는 정 반대의 상황이라 하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사의 화자나 내 상상 속 주인공 모두 사랑을 잃고 혼자인 사람이니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하겠다. 한 사람은 호수의 이편에서 한 사람은 호수의 저편에서 달을 보며 똑 같이, 하지만 서로 다른 의미로 “하늘도 무심하시지!”하고 탄식할 지도 모른다.
내가 이 곡을 좋아하는 이유는 멜로디에 담긴 슬픈 정서가 큰 부분을 차지 하지만 그 전에 피아노의 음색 때문이기도 하다. 비를 맞은 것처럼 눅눅한 질감, 그렇게 그랜드 피아노가 아닌 가정용 업라이트 피아노 같은 가벼운 질감, 조율이 덜 된 듯 맹맹한 질감이 개인적인 슬픔과 추억의 공간으로 나를 안내한다.
게다가 조빔의 피아노 연주가 어떤 전문가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 것도 곡을 한층 매력적으로 만든다. 간신히 자기 노래에 반주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피아노 연주자가 오른 손으로 멜로디를 한 음씩 짚어 나가는 듯한 연주, 나도 조금만 연습하면 서툴게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위태로운 연주가 애상의 정서를 강화한다.
보사노바의 스탠더드 곡인 만큼 참으로 수많은 연주자와 보컬들이 이 곡을 연주하고 노래했다. 하지만 나는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1963년 연주-<Getz/Gilberto> 앨범 녹음에 참여하고 약 두 달 뒤에 녹음한-가 최고라 생각한다. 심지어 조빔이 직접 노래한 버전도 이를 대체할 수 없다. 굳이 이에 필적할 버전을 하나 꼽으라 한다면 같은 해 2월, 그러니까 <Getz/Gilberto>보다 앞서 녹음된 스탄 겟츠의 <Jazz Samba Encore>에 담긴 버전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기서도 조빔은 피아노를 연주했다.
이별은 슬픔과 후회를 늘 남긴다. 슬프건 후회로 가득하건 음악은 그런 시간에도 흐른다. 무심하게. 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How Insensitive!)
특정 음악이 나올때마다 특정 기억이 떠오르는 일이 많아집니다.
의도하지 않는데…나이가 들면서 더 그러네요.
이 곡은 그 누구와도 공유한 적이 없는데도 희안하게 그렇습니다.
슬픔을 살짝 꾸욱.. 눌러 담은 듯한 게, 그렇다고 완전히 억누르지 않은…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오랜만이네요. ㅎ 없던 추억까지 자극하는 음악이 있죠.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곡들이 그런것 같습니다. ㅎ 담담한 곡이 때로는 더 슬프게 들리는 것 같아요.ㅎ
long time no see…입니당.^^
개인사정으로 당분간 인터넷을 끊어야 겠다고 다짐했으나, 재즈 스페이스는 잘 안되네요. ㅋ
슬픔을 격정적으로 표현하는 것 보다 정제되어 표현한 것이..개인적으론 여운이 훨씬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이 곡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래서인것 같고요.
실제 안으로 담는 것이 더 슬프니까요. 보통 소리지르는 노래들은 슬픔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듣게 되지 않던가요? 적어도 그런 정서적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