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는 만남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뉴 올리언즈에서 시작된 재즈의 탄생 자체가 그랬다. 이후 재즈 연주자 혹은 보컬들은 자유롭고 다양한 조합을 이루어 신선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 만남은 단지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기교적 완성도가 뛰어난 연주자들의 순간적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정신적인 부분에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이전과는 다른 깊이의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운명이 만나 하나의 우연을 만들어 내는 것과도 같았다.
노르웨이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토드 구스타프센의 이번 앨범이 바로 각각 확실한 방향성을 지닌 연주자들이 만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 음악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피아노 연주자와 아프카니스탄 혈통의 독일 여성 보컬 시만 탠더의 만남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토드 구스타프센은 시민 탠더의 문화적 배경에 흥미를 느껴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것 같다. 그 기획은 단지 시민 탠더의 아프카니스탄과 이슬람 문화적 배경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아노 연주자 자신의 문화적 배경과 어울리게 해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토드 구스타프센은 모국 노르웨이 교회 음악의 전통곡을 선택했다. 자신이 재즈를 알기 전부터 좋아했던 음악이었다. 그리고 이 가사를 아프카니스탄 시인 B. 함사야가 파시토(Pashto)어-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등에서 사용하는 이란어-로 옮긴 것을 사용했다. 나아가 자작곡은 페르시아 신비주의 시인 루미의 시를 미국 시인 콜맨 바크스가 번역한 것, 미국의 비트 시인 케네스 렉스로스의 시를 가사로 사용했다.
말하자면 이번 앨범은 유럽 기독교와 이슬람 신비주의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번 앨범을 종교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음악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은 종교적, 문화적 이질감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리오의 음악은 특정 종교를 넘은 경외와 동경의 정서를 느끼게 한다. 또한 파시토어 가사는 그 의미를 모르는 보통의 감상자들에게는 이국적인 것을 너머 음악적 분절로 다가온다. 그냥 들어서 아름다운. 의미는 모르지만 간절함을 느끼게 되는 음악으로 느끼게 한다. 여기에는 분명 수잔 아부헬이나 그룹 시미놀로지의 독일 출신 보컬 시민 사마와티에 견줄만한 시민 탠더의 낭송과 노래의 경계에 놓인 듯한 창법이 큰 역할을 했다.
한편 토드 구스타프센은 피아노 외에 일렉트로닉스와 신스 베이스 등을 오가며 솔로 연주보다는 곡 전체의 분위기 연출에 주력했다. 특히 신스 패드 연주는 곡 전체에 편재하며 무의식적 경건함으로 이끈다.
앨범마다 토드 구스타프센은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매번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 중 이번 앨범은 개인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결과물을 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꼭 보컬이 참여해서가 아니라 음악 자체가 주는 정서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가장 대중 친화적인 면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혹 트리오 앨범이라는 소식에 2007년 <Being There> 이후 만나기 힘든 피아노 트리오 앨범을 기대했던 감상자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이 앨범은 아쉬움이 아닌 색다른 편성의 완성도 높은 트리오 앨범으로 다가올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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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굉장히 서정적이네요.
토드 구스타프센 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시도 속에서도 뭔가 이 트리오만의 음악적 색채가 여전히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예. 색다른 느낌을 주지만 서정적인 부분은 매우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니고 있죠.
음악을 듣다보면 에스닉한 특수성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바로 그 순간,
어떤 요소가 그렇게 만들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정해진 메커니즘은 없는 것 같다는게.. 개인적인 결론이었어요.
연결된 다양한 요소들이 우연적으로 결합한 결과라고나 할까요..
메커니즘보다 마음이 만들었겠죠. 0과 1사이도 아니고 0과 0.1사이도 아닌…디지털화하기 어려운 어떤 비율이 만들어 낸 일종의 기적 같은 것. 뭐 제가 신비주의자는 아니지만 음악은 그런 것 같아요. 그것이 쉽게 말하면 우연일 수 있겠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