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함박눈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눈 속을 걸었다. 올 겨울 들어 눈다운 눈을 맞기는 처음인 것 같다. 녹는 것이 아쉽지만 제법 멋지다. 찬 공기가 옷 사이로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괜히 따스함을 느꼈다.
이런 날에는 정말 일하기 싫다.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고 싶다. 갑자기 경험해 보지도 않은 장면이 추억처럼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 장면은 이렇다.
녹이 슨 갈색 연탄 난로가 있다. 난로에 연결된 갈색 얼룩이 진 함석 연통은 천장으로 솟아 몸을 굽혀 책상 몇 개를 너머 창 밖으로 나 있다. 난로 위에는 주전자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내 책상이 있다. 책상 위에는 갈색과 베이지 색이 어우러진 8각형 사기 컵이 놓여 있다. 컵에는 방금 주전자에서 따른 뜨거운 물이 담겨 있다. 나는 의자에 앉아 그 컵을 오른손으로 쥐고 왼손으로 아래를 받친 채 창 밖을 본다.
창 밖으로 가로 70미터 세로 50미터 크기의 땅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내가 있는 곳은 학교 교무실인 모양이다. 맞다. 멀리 노란색 철봉과 파란색 구름다리가 보인다. 눈은 운동장을 덮고 철봉과 구름다리까지 하얗게 물들인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 눈이 15도 경사로 내린다. 그 바람에 느티나무 가지에 걸쳐있던 눈이 스스슥 아래로 떨어진다.
아이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직 방학이 끝나지 않은 것일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사무실 아니 내가 있는 교무실이 텅 빈 것을 보니 방학인 모양이다. 나는 일직을 서고 있는 것일 테고. 그냥 혹시라도 일어날 사태를 기다리며-실은 아무일 없기를 바라며-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 나는 할 일이 없다. 가끔씩 난로 위 주전자를 들어 뜨거운 물을 8각형 컵에 따르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하지만 하얀 풍경에 지워진 나는 그마저도 하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는다.
잘못 걸린 것일지라도 전화벨이 한번 울린다면 이 정물적 느낌이 들지 않을 텐데. 그 때 나는 음악을 생각한다. 오로지 생각만 한다. 책상 앞 교안 옆에 놓인 라디오를 켜지도 않고 오로지 머리 속으로 음악을 생각한다.
그 음악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모르겠다. 이제 일하자. 창 밖은 보지 말자.
아… 이 아련함..
무엇에 대한 아련함인지는 모르겠지만, 딱 그 느낌이 떠오르네요.
예. 그냥 생각나는 대로 연주한 것 같은데 그 안에 일관된 이미지, 정서가 담겨 있어서 좋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