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 윤동주를 주제로 한 영화이다. 정확하게는 윤동주와 그의 이종사촌으로 어린시절부터 함께 자라고 평생 친구로 함께 했던 송몽규의 삶을 그린 영화이다. 감독이 윤동주의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던 것은 시인의 시가 지닌 아름다움 비극적 죽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송몽규와 윤동주가 지녔던 차이가 주는 극적인 면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실제 영화를 보면 윤동주보다는 송몽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대한독립을 꿈꾸었던 혁명가였던 송몽규의 삶의 궤적을 따라 그 상황에서의 윤동주를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늘 함께 했었기에 가능했다.
송몽규가 주체적으로 그려지다보니 상대적으로 윤동주는 섬세하고 소심한 면이 강한 인물로 그려졌다. 그의 시처럼 아름다움의 가치, 이를 담아내는 문학, 특히 시의 가치를 믿었던 인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시집을 내고 싶었던 인물. 그래서 시대적 상황에 따른 울분은 있었지만 독립 운동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인물로 그려진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어쩌면 윤동주가 매우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부분은 문학청년, 순수한 청년 윤동주를 그리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이 암울한 시대에) 시인이 되고팠던 제가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하게 했던 것이리라. 그런데 영화 말미에 나오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을 정리한 연보를 보면 윤동주가 송몽규보다는 외향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문학으로 현실을 잊으려 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 했음을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이러한 윤동주의 모습에 공감하지 못하고 독립을 위해 뛰어다녔던 송몽규의 삶에 더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지도 모르겠다. 나도 어느 정도 이에 공감한다. 약한 윤동주만 보였던 것이 아쉽다. 하지만 나는 순수한 영혼,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고팠던 한 청년이 전체주의, 제국주의의 상황에서 어떻게 억압을 받는가를 감독이 보여주려 했다고 본다. 지금은 너무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시집이지만 당시 윤동주에게 시집은 너무나 먼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시집에 대한 욕심을 냈던 것은 그가 시집을 통해 유명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시인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나약한 윤동주를 감독이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윤동주의 시를 상황상황에 맞추어 독백 형태로 삽입한 것이리라. 실제 그 상황에서, 그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그 시를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삶과 특정 상황 앞에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말 그대로 문학적이다.
한편 영화의 흐름은 그렇게 자극적이지 않다. TV 단막극 같은 느낌으로 잔잔하게 흘러간다. 그래서 영화 같은 맛이 없다. 흑백으로 찍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함이 없다. 하긴 극적인 긴장을 살리기 위해 허구를 더 넣고 감정적인 부분을 강조했다면 애국을 주제로 한 신파 영화의 느낌이 났을 것이다. 서사의 진행, 편집 등에 빈틈이 많으면서 괜히 독립을 향한 개인의 희생으로 승부를 보려는 서툰 영화 같았을 것이다.
중학생 시절 나는 습관적으로 윤동주의 “서시”를 공책에 옮겨 적곤 했다. 옮겨 적으며 글씨를 예쁘게 쓰는 연습을 했다. 그의 “자화상”도 자주 옮겨 적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를 알고 “서시”를 알았다. 마치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처럼 “서시”, “자화상”,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람들이 읽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들의 시선에서 윤동주가 사라진 것 같다. 부디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세상의 관심이 커지기를 바란다. 나도 불현듯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