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하루를 시적인 특별한 날로 만드는 음악
햇살이 가득한 오전 10시의 일요일은 언제나 여유롭다. 특별한 계획이 없더라도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상쾌함이 몸을 감싼다. 설령 그 기대가 막연한 것으로 끝나버려도 상관 없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만으로도 좋다. 늘 시간에 쫓겨 나를 잃고 살다가 일 없이 하루를 보내며 몸과 마음의 부담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니까.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이현정의 두 번째 앨범을 들으며 나는 한가한 일요일을 떠올렸다.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더라고 충분히 나에 대해 생각하고 그(녀)를 그리워하고 외로움을 아늑한 것으로 치환할 수 있는 시간을 생각했다.
이런 느낌은 이현정의 목소리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녀는 소녀처럼 노래한다. 청순하고 담백하다. 이것은 앨범의 첫 곡 “아름다운 설레임”부터 시작된다. 이 곡에서 이현정은 매일매일이 사랑에 빠져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한 행복한 여인을 노래한다. 그녀에게는 솜사탕 같은 달콤함과 오렌지 주스 같은 상큼함만이 있을 뿐이다. 한편 그 소녀는 “Dreaming”에서는 사랑 가득한 내일을 꿈꾸며 타이틀 곡 “We’re Still In Love”에서는 약간의 우수로 사랑의 어려움을 위로할 줄도 안다. “G 선상의 아리아”는 어떤가? 이 곡에서 그녀는 바흐의 선율로 감상자를 매혹하는 청초한 천사로 나타난다.
이현정의 소녀처럼 맑은 노래는 블로섬 디어리로 대표되는 블론디 보컬, 그러니까 귀여운 이미지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백인 여성 보컬의 계보에 넣을만하다. 더 나아가면 재즈의 종주국이라 하는 미국의 흑인 보컬들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개성을 과감하게 불어 넣었던 유럽 쪽 보컬들을 많이 생각하게 한다. 유럽의 유명 보컬들은 노래에 시성(詩性)을 넣어 노래하곤 한다.
실제 이현정의 노래에서도 시적인 감흥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세상을 떠난 외사촌-이상으로 가까웠던-언니를 위한 “Zinnia Elegans(백일홍)”, 제목부터가 시적인 “마음의 시”, 바람 부는 겨울 날 눈 위를 걷는 소리로 시작하는 외로움 가득한 “겨울 바람”, 개인적으로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들었던“잊지 말아요” 등의 곡들이 대표적이다. 이들 곡들에서 그녀는 시적 화자가 되어 이별, 그리움, 외로움, 청춘, 그리고 장엄한 자연, 그래도 지속되는 삶에 관해 아름답게 노래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가사 이상으로 스캣을 집중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에서 시작해 엘라 핏제랄드가 모범을 완성했던 스캣은 특별한 가사 없이 ‘두비두바’하는 식의 구음(口音)으로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재즈 보컬들은 이 스캣 창법으로 트럼펫이나 색소폰 솔로에 버금가는 즉흥 솔로를 펼쳤고 이를 통해 자신의 화려한 기교적 역량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이현정은 좀 다르다. 그녀의 스캣은 기교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 “아름다운 설레임”, “G선상의 아리아”에서 전형적인 스캣을 들려주긴 하지만 대부분 짧은 음들을 이어가는 대신 긴 호흡으로 음을 길게 사용하고 그 음들을 부드럽게 레가토(Legato)로 이어가 화려함보다는 부드럽고 우아한 목소리의 질감을 더 많이 느끼게 한다. 그래서 엘라 핏제랄드로 대표되는 재즈 보컬보다는 다니엘 리카리 같은 보칼리제로 유명한 보컬을 더 많이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고 나는 동양인인 그녀가 흑인 보컬과 백인 보컬 혹은 유럽의 보컬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의 창법을 음악적인 이유에 근거해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가 가장 자연스레 노래할 수 있는 창법, 자신의 내면을 편하게 드러낼 수 있는 창법을 선택한 결과이다.
한편 이번 앨범은 보컬 이현정의 두 번째 앨범인 동시에 트리오 앨범이기도 하다. 이 앨범의 라이너 노트를 부탁 받으며 나는 그녀에게 어떤 편성으로 녹음했냐고 물었다. 이에 그녀는 피아노, 베이스 그리고 보컬이 함께 한 트리오 앨범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와 마음이 맞는 연주자들과 함께 했다고 했다. 그녀와 마음 맞는 연주자들은 피아노 연주자 박윤미 베이스 연주자 정상이이다. 그리고 두 연주자는 단순히 보컬을 지원하고 반주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보컬과 대등한 차원에서 공간을 점유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이현정과 함께 시를 써 내려간다.
특히 박윤미의 피아노가 그렇다. 예를 들면 청춘을 산토끼에 비유한 “산토끼”에서 박윤미의 피아노는 보컬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너머 나의 삶을 찾아 방황과 노력을 오가는 청춘의 복잡한 정서를 충분한 호흡으로 직접 표현한다. 이 외에 “Vos Yeux Comme Le Lac 호수 같은 그대의 눈”, 흐린 하늘에서 인생을 생각하며 썼다는 “Gray In The Sky” 등의 곡들에서도 보컬만큼이나 피아노의 아름다움이 선연히 드러난다. 정상이의 베이스 연주도 마찬가지다. 그의 베이스는 악기의 특성상 자주 전면에 나서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지막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명확한 울림으로 곡을 서정시의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어쩌면 이현정이 가사보다는 스캣 혹은 보칼리제를 적극 사용한 것은 자신의 보컬만큼이나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곡의 시적 지향점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트리오의 움직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다. 감상자가 이현정이라는 보컬, 박윤미라는 피아노 연주자, 정상이라는 베이스 연주자의 존재감과 함께 이 셋이 모여 만들어 낸 서정시를 명확히 느낄 수 있게 했으니 말이다.
한편 시적이기 때문일까> 이현정의 노래와 트리오의 사운드는 희망, 사랑, 밝음, 긍정과 함께 외로움, 그리움, 겨울 등 다소 어두울 수 있는 부분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마냥 밝고 마냥 어둡지 않다. 직접적으로 감상자를 동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지적인 감상을 요구하고 이를 통해 직관적인 이해, 깨달음을 유도한다. 마치 미술관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을 때 느끼는 현실 밖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라 할까?
그렇다고 이현정과 트리오의 음악이 정서적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트리오가 자신의 감정을 과잉 되게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밝은 감정과 어두운 감정이 공존함에도 앨범은 어지럽지 않고 평온하다. 잔잔한 평형의 상태로 감상자를 이끈다.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깊게 가라앉은 마음을 위안의 상태로 끌어 올린다. 이 앨범에서 내가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 자체로 행복한 일요일을 떠 올렸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 나는 이 글을 10월 25일 일요일에 쓰고 있다. 일주일 정도 매일 한두 차례 앨범을 듣다가 오늘은 하루 종일 들었다. 노래 이상으로 스캣과 보칼리제를 사용하는 이현정의 창법에 신선함을 느끼고 보컬만큼이나 존재감을 드러내며 앨범의 시성을 고취하는 베이스와 피아노의 연주에 아름다움을 느끼다 보니 평범한 듯 보이는 일요일이 매우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렇다. 어쩌면 이현정과 트리오는 복잡한 우리의 일상을 시적인 음악으로 평온하게 만드는 것을 너머 특별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인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