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ele – Million Years Ago

슬픔도 쾌감이다.

오늘 어제와 오늘 아델의 새 앨범 <25>를 들었다. 내가 갖고 있는 아델의 이미지와는 다소 다른 질감의 음악이었지만 좋았다. 그 가운데 “Million Years Ago”가 제일 먼저 귀에 들어왔다. 한국 감상자들 대부분은 이런 내 생각에 공감하리라 믿는다. 가사를 우리말로 바꾸면 그냥 평범한 가요가 될 듯한 신파조의 멜로디이니 말이다. (프랑스어로 노래해도 그럴 것 같긴 하다.)

이 곡을 아델은 눈물을 참듯이, 그래서 더 슬프게 노래한다. 그래서 듣고 있는 나를 슬픔에 빠지게 했다. 특히 오늘 아침 눈 내리기 직전 꾸물꾸물한 하늘 아래를 운전하며 들었을 때는 이 곡이 오늘의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슬프게 살아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슬프지 않은 사람이 음악을 듣고 슬퍼져도 좋아하는 것일까? 현실의 슬픔은 괴롭고 힘든 것, 피아고 싶은 감정이 아니던가? 내가 아닌 타인의 고통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일까? 아니다. 그러면 노래에 공감하기 어렵다. 노래의 슬픔을 몸으로 받아들여야만 그 노래를 좋아할 수 있다.

이는 음악 심리학에 관심은 있지만 공부하지 않은 나로서는 알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면 슬픈 발라드는 매운맛과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매운맛은 사실 맛이 아니라 혀의 통증이다. 그럼에도 매운맛을 찾게 되는 것은 매운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몸이 엔도르핀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슬픔 또한 고통이니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이 엔도르핀을 촉진하지 않을까? 그래서 매울 때 땀이 나듯이 슬플 때 눈물이 나는 것은 아닐까?

이 경우 우리는 기쁘고 즐겁기 위해 스스로를 슬픈 상황으로 몰아넣는 셈이 된다. 그래서 현재보다 좋았던 지난 날을 그리워 하고 돌아갈 수 없음에 슬퍼하는 이런 노래를 들으며 자신을 패배자, 실연자로 투영하는 것이다.

유튜브에는 이 곡의 앨범 버전이 올라와 있지 않다. 발매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새앨범을 주로 듣는 나는 그래서 소개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음악이 많다.) 그런데 다행히 며칠 전에 있었던 TV 라이브 영상이 올라왔다. 여러모로 앨범과 유사한 느낌을 주기에 소개한다.

PS: 그나저나 머라이어 캐리의 “My All”과 이 곡은 어떤 관계일까? 첫 세 음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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