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간다. 동네에서 동네로 하는 이사라 큰 부담은 없다. 게다가 요즈음은 짐을 싸서 다시 푸는 것까지 책임지는 포장이사가 일반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 이사는 이삿짐 센터 사장님이 CD를 박스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도 직접 사과박스 수십 개와 스카치 테이프까지 사서 주면서. 지난 번 이사를 할 때 잘 해주셔서 이번에도 부탁을 드렸는데 이전 이사 때 CD장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매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냥 지난 번처럼 CD장을 그대로 옮기면 여러 모로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탁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일요일 오후 내내 CD를 박스에 넣었다.
CD를 박스에 넣다 보니 일이 귀찮고 힘들어서인지 도대체 이 CD들을 왜 버리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년에 한번도 듣지 않는 앨범들이 거의 대부분인데 말이다. 그냥 새로운 앨범을 듣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처분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물론 생각은 이리 해도 나는 CD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내가 들은 앨범과 읽은 책들로 꾸며진 도서관을 만들겠다는 꿈 때문은 아니다. CD가 도태되는 지금 이 꿈은 덩달아 의미를 잃었다. 그보다는 앨범 한 장 한 장에 담긴 추억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처음 산 CD였던 빌리 할리데이의 <Lady In Satin>, 선물로 처음 생긴 CD였던 듀크 조던의 <Flight To Denmark>, 프랑스에서 손가락 두개를 잃어버린 우아한 여점원의 추천으로 구매했던 데이브 더글라스의 <Charm Of The Night Sky> 처럼 이런저런 추억이 앨범마다 담겨 있다. 그래서 만약 CD를 처분해야 한다면 국내외 음반사에서 받고 잡지사에서 받은 앨범들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나름대로 그 당시를 희미하게나마 담고 있기에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 CD들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CD들을 막 박스에 넣으면서 ‘어라? 내가 이 앨범도 있었네?’하며 불쑥 튀어나온 앨범들이 몇 있었다. 매달 쏟아지듯 발매되는 새 앨범들을 듣느라 잊고 있었던 앨범들이다. 진 해리스의 <Tribute To Count Basie>가 그렇다. 카운트 베이시에 대한 헌정의 의미를 담은 이 앨범은 블루스로 가득하다. 진득하면서도 산뜻한, 이질적이라 생각되는 부분이 잘 어우러진 연주를 들려준다. 타이틀 곡에 해당하는 ‘Captain Bill’이 대표적이다. 카운트 베이시의 진수를 잘 이해했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든다.
여름에 들었다면 조금은 후끈거리는 느낌에 시원한 음료를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가을이라서 그런가? 점성질 강한 연주가 귀에 잘 들어온다. 포장마차 오뎅국물-어묵국이라고 하면 뉘앙스가 사라진다-의 맛이라고 할까? 가슴을 그리고 마음을 후끈하게 해준다.
그나저나 이사 가면 CD를 또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