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빅 밴드 하면 몇 개의 브라스 섹션들이 날렵하게 움직이고 교차하며 경쾌한 흔들림을 만들어 내는 스윙 밴드가 제일 먼저 떠 오른다. 하지만 현대 빅 밴드들의 상당수는 그 전형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특히 클래식의 오케스트라처럼 작곡가 겸 지휘자의 음악적 의도를 구현하는 빅 밴드들이 다수 눈에 띈다. 듀크 엘링턴이나 카운트 베이시 보다는 길 에반스를 전형으로 한 빅 밴드가 많다고 할까?
10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10여년간 공부를 한 피아노 연주자 진수영이 이번 두 번째 앨범에서 시도한 빅 밴드 연주 또한 전통보다는 현대적인 것에 속한다. 피아노 연주까지 포기하고 작곡과 지휘에 전념한 이번 앨범에서 그는 우화를 주제로 한 자신의 상상력을 음악에 투영했다. 이를 위해 그는 6 곡을 각각 꽃, 멸종된 고대의 새, 토끼, 고양이, 불 등에 관한 우화의 한 장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그 우화의 내용을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곡 마다 부여된 약간의 단서만으로 감상자들이 음악을 들으며 그 위에 직접 이야기를 붙이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진수영은 그동안 활동하면서 만났던 20여명의 연주자를 불렀다. 빅 밴드 가운데서도 매우 큰 규모의 편성이다. 그래서 이들을 어떻게 운용할까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진수영은 트럼펫, 색소폰, 트롬본이 지닌 무게감의 차이를 활용해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고 다시 관악기 솔로는 물론 피아노와 기타의 솔로를 입혀 중심을 이동하게 해 절로 극적인 효과가 발생하도록 했다. 세 개로 나뉜 브라스 섹션이 하나씩 등장해 사운드를 서서히 두텁게 만들어 가는 첫 곡 ‘The Language Of Flowers’가 그렇다. 마지막 곡 ‘After Dark, All Cats Are Leopards’에서도 여러 개로 나뉜 섹션의 교차로 깊이와 긴장을 만들어 낸다.
한편 ‘Jasmine’과 ‘Mad Rabbit’s Waltz’에서는 진수영의 멜로디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우수로 가득한 멜로디를 그는 색소폰, 트럼펫 솔로, 보컬 등을 통해 지속시키고 그 뒤로 브라스 섹션이 부드럽게 교차하며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게 함으로써 욕망과 배신에 관한 비극적 우화를 완성하게 했다.
한편 브라스 섹션의 밀도를 조금 높여 사운드 전체의 양감을 더 크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서사적 상상력을 담고 있는 앨범인 만큼 조금은 더 뜨거운 에너지로 과감하게 상승하고 하강하는 연주를 펼쳤다면 극적인 더 좋은 효과를 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단지 크게 연주했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피아니시모에서도 공간을 점유하는 클래식 오케스트라처럼 빅 밴드의 울림이 감상자를 더 압도했다면 진수영이 제시한 서사적 풍경이 주는 정서적 효과가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앙상블과 솔로를 섬세하게 조화시키려는 대부분의 시도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이기에 지속적인 탐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조금 더 욕심을 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진수영의 작,편곡 그리고 빅 밴드의 연주는 우화라는 앨범 주제에 충실하다. 감상자를 여행, 사랑의 기쁨과 아픔, 모험, 배신, 재기와 희망으로 이루어진 서사적 상상으로 이끈다. 따라서 진수영이 의도했을 능동적인 감상으로 감상자를 이끄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