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첼로 연주자 뱅상 쿠르투아의 앨범 를 듣는다. 절반은 첼로 솔로-오버더빙도 사용한-이고 절반은 소편성 연주로 채워진 앨범이다. 건조한 긴장감이 좋다. 고독하고 우울하지만 그것을 낭만으로 바꾸는 연주다.
그런데 이런 스타일의 연주를 과거에 들었을 때보다는 감흥이 덜하다. 예를 들면 데이빗 달링을 들었을 때보다 참신한 느낌이 덜하다. 이것은 뱅상 쿠르트아의 앨범이 덜 좋다는 것이 아니다. 평점을 준다면 나는 별 넷을 주었을 것이다. 데이빗 달링도 앨범마다 편차는 있지만 비슷한 평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뱅상 쿠르투아의 음악을 좋네…하면서 느낌표를 찍지 못하는 것은 내가 그만큼 이런 스타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산해진미를 오래 먹은 사람의 입맛이랄까?
뱅상 쿠르투아 뿐만 아니라 요즈음 듣는 새로운 앨범들 대부분이 그렇다. 완전히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지 않다. 듣는 순간 저절로 과거의 누구, 지난 어떤 음악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 누구도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생각하면 이것은 연주자의 잘못이 아니다. 그냥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엔 나의 문제로 돌아온다. 연주자가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가기 위해 노력하듯이 나 또한 그리 감상해야 한다. 확인하기 위해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만나기 위해 음악을 들어야 한다. 새로 만난 여인에게서 지난 사랑의 그림자부터 찾으려 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나는 늙은 것이고 또 그렇다면 나는 새 앨범이 아닌 지난 앨범을 들어야 한다. 지난 시간의 먼지가 쌓인 익숙한 연주나 들으며 그땐 좋았지 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재즈를 재즈로 듣지 않아야 한다.
뱅상 쿠르투아의 이번 앨범은 소편성 연주보다 솔로 연주가 좋다. 음악이 문학적이다. 그 가운데 유 튜브에 ‘1852 metres plus tard’의 짧은 버전이 있어 소개한다. 이 곡은 제목이 참 흥미롭다. 우리 말로 ‘1852미터 후에’로 해석하면 어색하지 않게 들릴 지 모르지만 ‘plus tard’가 의미하는 ‘~후에’는 시간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것에 거리를 의미하는 ‘미터’가 나온 것이다. ‘1852미터를 가는 시간만큼 뒤에’로 해석하면 옳을까? 모르겠다. 아무튼 시간과 거리가 결합된 제목으로 인해 나는 아르코와 피치카토가 더빙을 통해 교차하는 연주에서 차원의 뒤틀림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