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Benson – Sweet Taste Of Love

조금 전에 소개한 ‘Shiny Stocking’ 이야기를 하면서 이어진 생각.

패티쉬는 우리 말로 물신(物神)으로 해석된다. 즉, 특정 물건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이런 성향이 있지 않은가? 특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음반에 집착하게 된다. 심한 경우 음악이 밀려나 뜯지도 않을 거면서 음반을 모으고 또 모은다. 심한 경우에는 CD와 LP를 나누고 라이선스와 수입반을 나누고 더 나아가서는 미국반, 유럽반, 일본반을 나눈다.

나도 한 때 그랬다. 초코파이 하나로 점심을 때우며 음반을 사고 또 샀다. 파리 시절에는 지하철 정기권까지 포기하고 걸어 다니며 음반을 샀다. 생각해 보면 음반이전에도 나는 특정 물건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문방구-문구점!-에서 파는 수첩-그러니까 지금의 다이어리 같은-에 빠져 쓰지도 않을 수첩을 모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각 주머니마다 수첩을 넣고 다니며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그것을 틈틈히 꺼내보곤 했다. 이후에는 샤프 연필에 빠져 여러 개를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시나 명언을 예쁜 글씨로 적어 놓은 코팅된 책갈피에 빠져 그것을 수 백장 모으기도 했다. 그러다가 음반에 빠지게 되었다.

글쎄. 패티쉬라는 말 안에 성적인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패티쉬적인 성향이 없다. 음반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지는 않으니까. 음악도 마찬가지. 음악을 들으며 성적인 흥분을 느껴본 적이 없다. 요즈음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음악에서 성적인 면을 강조한 음악이 나오고 있다지만 그 또한 음악 이상의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지 벤슨의 ‘ Sweet Taste of Love’같은 곡은 성적인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의도적으로 포르노그래피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그 뿐이다. 음악은 어디까지나 내게 있어 이런저런 상상을 자극하는 음악이다. 그 안에 야한 상상을 자극하는 음악이 가끔 들어 있을 뿐.

그나저나 이 환한 대낮에 이런 음악을 듣자니 별로다. 제목이 의미하는 사랑의 달달한 맛보다는 문 열어 놓고 야한 영화를 보는 긴장이 느껴진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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