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 때문일까? 박성연 선생의 오랜 만의 새 앨범을 받았을 때 나는 마음이 살짝 무거워졌다. 특히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앨범이라는 것은 앨범 감상을 더욱 주저하게 했다. 빌리 할리데이의 <Lady In Satin>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솔직히 선생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레이디 데이가 갈라지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슴이 메어지는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그리고 세상을 떠난 것처럼 혹시 이 앨범이 선생의 마지막 앨범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15년만의 새로운 앨범이 아니던가? 어쩌면 다시 비슷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게다가 선생은 십 수년째 신장 이상으로 힘들어하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하지만 이것은 나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었다. 분명 이 앨범에 담긴 선생의 노래와 1989년도 앨범 <박성연과 Jazz At The Janus>나 1998년도 앨범 <The Other Side Of 박성연>과 비교했을 때 선생의 목소리는 더 거칠어졌고 음역대도 좁아졌으며 호흡도 짧아졌다. 하지만 선생의 노래는 빛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노래란 기교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이요, 감상자를 감탄하게 하는 것을 넘어 감동시켜야 하는 것이라는 음악적 교훈을 느끼게 한다. 앨범 마지막 곡으로 초반을 무반주로 노래한 ‘Danny Boy’가 대표적이다.
이것은 선생이 자신의 현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그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기교적으로 더 화려했을 때를 그리워하기 보다 현재에 맞게 노래하기. 그렇기에 선생의 노래는 편안하고 낭만적이다. 일주일에 3일은 투석을 해야 하고 그래서 노래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기다려 한 곡씩 녹음해야 했던 안타까운 상황이 그려지지 않는다. 노래하는 순간 선생은 행복했고 그것을 노래에 그대로 담아냈을 뿐이다. 그렇기에 ‘What A Difference A Day Made’, ‘Once I Loved’, ‘Stardust’처럼 매일 클럽에서 노래하고 또 노래했을 스탠더드 곡과 이전 앨범에서 노래했던 ‘Antonio’s Song’, ‘물안개’등의 곡을 스캣 등의 꾸밈 없이 테마 멜로디만 차분하게 불렀음에도 선생의 노래는 푸근함과 함께 범접할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진다. 35년간 재즈 클럽 야누스를 운영하면서 한국 재즈의 대모로 살아온 존재감이.
앨범 리뷰를 뭐 이런 개인적 찬사로 도배하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한국 재즈의 어른이라고 그냥 대접하는 것이 아니냐 의심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앨범을 들어보라. 평범할 수도 있는 사운드에서 한 폭의 진동을 느끼게 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