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앨범은 유리 케인의 클래식에 대한 독자적 해석으로는 두 번째에 해당한다. 그런데 왜 바그너를 화두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바그너라는 인물이나 음악 그 자체보다는 바그너가 베네치아에 체류했을 당시 살롱 음악을 즐기는 베네치아의 분위기에 보다 더 많은 케인의 관심이 끌렸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앨범 내지에 담긴 베네치아의 분위기에 대한 바그너 본인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앨범이 주는 인상은 다른 앨범보다 클래식적인 분위기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바그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최소한 정통 연주를 감상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물론 그런 비교감상이 또 다른 재미를 주기는 한다. 그러나 케인의 의도는 바그너를 클래식적인 감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이 앨범이 New Music이나 Jazz에 들어간다는 것을 상기하자.) 베네치아의 노천 카페와 호텔에서 녹음을 할 때 참석했던 관객들은 그런 감상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앨범이 라이브로 녹음이 되었다고 해서 단지 생생한 라이브의 분위기를 단순히 담고 있다는 것으로 보면 안된다. 왜냐하면 아주 교묘한 케인의 아이디어가 이후의 과정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초현실적이다.
앨범의 시작은 카페를 메운 소규모 청중의 박수소리로 시작된다. 그런데 그 박수소리는 다른 공연 앨범에서 들리는 박수소리와는 좀 다르다. 보통 연주자가 무대 위에서 관객의 박수소리를 듣는-이를 위해서는 무대에서 관객을 향해 마이크를 설치한다.-이미지가 대부분인데 이 앨범은 앨범의 청자를 연주자 옆이 아니라 청중들 가운데에 위치 시킨다. 그래서 박수소리는 감상자의 옆에서 들리는 것같다. 반면 연주가 시작되면 감상자는 다시 연주자의 곁으로 공간 이동을 한다. 즉, 이 앨범에는 하나의 청점-Point of Listen, 미술의 시점에 해당하는-이 아닌 두 개의 청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은 실재를 벗어난다. 이것은 믹싱과 마스터링을 단지 앨범을 만들기 위한 차원이 아닌 음악적 효과를 내내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한 결과다.
특히, 6인조 편성의 사운드는 믹싱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더빙되어 최소한 10인조 이상의 사운드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이 앨범이 녹음되던 날 베네치아의 콰드리 카페나 메트로폴 호텔에 있었다면 이 앨범은 더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리 케인의 해석은 연주적 차원에서 순수 클래식적인 요소는 많이 함유하고 있음에도 클래식이 요구하는 정통성을 교묘히 피해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연주보다 광장에서 들리는 커다란 교회 종소리 관객과도 상관없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 등 베네치아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부상한다.
연주의 측면에서 본다면 재즈와 클래식을 섞어놓은 듯한 실내악 편성에 약간의 현대성이 가미된 편곡이지만 재즈라는 에티켓이 붙은 연주자가 감히 클래식을? 이라고 말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매우 고전적인 연주를 담고 있다. 클래식에 그다지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바그너는 과장이라고 할 정도로 감상적 낭만을 강조하는 음악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추어볼 때 소규모 편성으로 바그너의 음악에 담긴 개인적 내면성을 강조하는 연주를 펼친 뒤 이를 인위적으로 일반 오케스트라의 규모로 확대시키는 과정은 유리 케인이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바그너를 지휘봉이 아닌 스튜디오 장비로 지휘한 것이다. (사실 이런 방법은 유리 케인만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미 현대 음악의 거장들에게서 비슷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유리 케인의 의도가 얼마나 전달이 될 지는 개인적으로 많은 의문이 간다. 왜냐하면 음악을 벗어나는 거시적인 감상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앨범에 담긴 달콤하면서도 새로운 연주들은 감상자를 계속 음악에 가두어 놓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바그너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클래식에 가깝게 들리고 클래식을 들어본 사람들에게는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앨범이 이 앨범이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케인의 음악적 스타일은 그렇게 해서 역설적이게도 다시 한번 증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