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연주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력만큼이나 지속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안정적인 지원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즉,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제작자나 레이블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티브 쿤이 그랬다. 10대 시절부터 돈체리, 오넷 콜맨 등과 함께 수학하고 스탄 겟츠, 올리버 넬슨, 게리 맥파랜드 등과 활동하기도 했던 스티브 쿤은 50년대부터 키스 자렛, 칙 코리아 등과 함께 재즈 계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낼 피아노 연주자로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 레이블에서 안정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프레스티지, 임펄스, 뮤즈 같은 재즈사의 중요한 레이블에서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지만 모두 단발에 그쳤다. 그런 중에 독일 뮌헨에서 설립된 ECM 레이블과 함께 하게 된 것은 그의 음악 인생에 있어 큰 전환점이었다.
그는 게리 맥파랜드의 곡을 연주한 <The October Suite>(impulse! 1966)로 ECM의 제작자 만프레드 아이허의 관심을 얻어 1974년 ECM과 계약을 하게 되었다. 계약 후 그는 1974년 11월 11과 12일, 이틀에 걸쳐 뉴욕에서 타악기가 가세한 확장된 트리오 형식의 앨범 <Trance>를 녹음했다. 그리고 10일 뒤에 노르웨이로 날아가 솔로 앨범 <Ecstasy>를 녹음했다. 하지만 <Ecstasy>가 먼저 발매되었고 이 앨범은 그 다음에 발매되었다. 그래서일까? 지난 2008년 <Life’s Backward Glances (Solo & Quartets)>란 타이틀로 그동안 LP로만 발매되어 찾기 어려웠던 스티브 쿤의 ECM에서의 초창기 앨범 석 장을 모은 앨범이 기획되었을 때도 <Ecstasy>는 포함되었어도 이 앨범은 포함되지 않았다. 정작 기획 앨범의 타이틀은 이번 앨범에 마지막 곡에서 가져온 것임에도 말이다. (다른 두 앨범은 <Motility>(1977), <Playground>(1979)였다.) 아마도 1999년 일본에서 따로 CD가 발매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또한 구하기 어려운 편이다. (나 역시 LP로 소장하고 있다.)
이 앨범에서 스티브 쿤은 스티브 스왈로우(베이스), 잭 드조넷(드럼), 슈 에반스(타악기)와 함께 하고 있다. 연주 인원으로 보면 쿼텟에 해당하지만 타악기가 드럼의 보조 역할만 하는 만큼 질감은 트리오에 가깝다. 이 세 연주자와 함께 그는 피아노와 펜더 로즈를 오가며 60년대를 가로질러 70년대에 이르는 동안 그가 겪었던 모든 음악적 경험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면 첫 곡에 배치된 타이틀 곡의 연주에서는 칼라 블레이를 연상시키는 테마 속에서 모달 재즈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왼손을 배경으로 자유로이 하지만 그 안에서도 반복적인 느낌을 주는 오른 손 연주는 분명 모달 재즈의 반영이다. 한편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곡이라 생각되는 ‘A Change Of Face’같은 곡에서는 당시 대세를 형성하던 칙 코리아의 리턴 투 포에버의 퓨전 재즈를 연상시킨다. 특히 스티브 쿤의 펜더 로즈는 칙 코리아를 많이 닮았다. 그리고 일렉트릭 베이스와 타악기의 긴밀한 어울림은 칙 코리아 그룹의 라틴적 색채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펜더 로즈 연주가 가장 돋보이는‘Something Everywhere’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한편‘Squirt’에서는 베이스 없이 잭 드조넷과 슈 에반스의 타악기 연주와의 자유로운 호흡으로 프리 재즈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이것은 다시 (타악기가 함께 하지만) 스티브 스왈로우의 베이스와의 호흡에 집중한 ‘Sandhouse’로 이어진다. 이렇게 60년대와 70년대의 재즈 정신을 결정했던 스타일을 넘나드는 연주는 어찌 보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적이거나 경쾌하게 스윙하는 스티브 쿤의 이미지와는 다른 것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앨범에도 지금의 서정성의 단초라 할 수 있는 연주가 담겨 있다. 피아노 솔로로 연주한‘Silver’가 대표적이다. 이 곡은 가깝게는 10일 후 노르웨이에서 녹음할 <Ecstasy>의 전조를 느끼게 할뿐더러 나아가 이후 펼쳐질 그만의 서정적인 세계의 청사진을 엿보게 한다. 다소 어두운 긴장을 배경으로 특유의 서정주의를 드러내는 앨범의 마지막 곡 ‘Life’s Backward Glance’도 이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이 앨범은 지금보다 더 다채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던 스티브 쿤의 초기 시절을 확인하게 해준다.
한편 이 앨범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존 콜트레인과의 관계를 유추하게 해준다. 알려졌다시피 스티브 쿤은 1960년 맥코이 타이너가 가세해 ‘더 클래식 쿼텟’을 이루기 전까지 존 콜트레인 쿼텟의 피아노 연주자로 약 두 달간 활동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녹음이 존재하지 않아 전설처럼만 남아 있다. 그리고 최근의 스티브 쿤의 연주를 두고 생각하면 존 콜트레인과의 조합이 그리 잘 상상되지 않는다. 그런 중에 이 앨범은 비록 14년 이후의 연주이긴 하지만 당시 스티브 쿤이 존 콜트레인의 열정에 충분히 어울릴 수 있는 뜨거움을 지녔음을 확인하게 한다. 두 연주자 사이에 음악적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고 그렇기에 그 어울림이 오래가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