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바실리스 자브로풀로스를 보면 나는 키스 자렛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흔히 말하듯 그가 키스 자렛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ECM의 재즈 피아노 연주자 가운데 그는 가장 키스 자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키스 자렛과 비교하게 되는 것은 클래식과 재즈를 오가는 그의 활동 양상이다. 여기서 나는 즉흥적 열정에 겨워 부단히 편성을 넘나들며 자신을 분출하던 젋은 날의 키스 자렛을 연상하게 된다.
아무튼 오랜 시간 클래식 엘리트 코스-파리 국립 고등 음악원부터 줄리어드 음대까지-를 밟고 클래식 콘서트 연주자로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칙 코리아의 영향으로 즉흥 연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ECM을 통해 새로운 음악 인생을 살고 있는데 그 새로운 음악 인생은 클래식에서 재즈로 넘어왔다기 보다 클래식과 재즈가 혼재 된 느낌이 더 강하다. 실제 그가 ECM을 통해 발매한 앨범들을 보면 즉흥 연주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클래식적인 맛이 강하다. 첼로 연주자 안자 레흐너와의 앨범들도 그랬고 고대 비잔틴 음악의 향기로 가득했던 첫 번째 솔로 앨범 <Akroasis>도 그랬다. 두 번째가 되는 이번 솔로 앨범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재즈보다는 클래식에 가까운 터치로 그는 클래식적인 느낌으로 자유로운 즉흥 연주를 펼친다.
그런데 이번 두 번째 솔로 앨범은 지금까지 그가 녹음한 앨범들 가운데 가장 개인적인 맛이 강하지 않나 싶다. 이전 그의 앨범들이 피아노 트리오라는 형식과 그의 고향 그리스의 고유한 정서, 혹은 한 클래식 작곡가의 그늘 안에서 자신을 드러냈다면 이번 앨범은 순수하게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위해 그는 상당히 단순 간결한 구조를 기반으로 연주를 펼친다. 그리고 그 간결한 구조는 작곡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지만 순간적으로 자유로이 상상을 발현해 나가는 풍성한 동기로 작용한다. 그래서 그의 피아노 솔로 연주는 분명 적은 수의 음을 사용하고 그래서 공간적 여백을 드러내는 내성적이고 정적인 면을 띄고 있지만 하나하나 공을 들여 선택한 음들로 섬세하게 조직된 연주에서 오는 정서적 울림만큼은 오케스트라 이상으로 다가온다. 집중력을 요구하지만 그만큼 두고두고 새롭게 그리고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연주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한번 키스 자렛을 떠올리게 되는데 스타일의 문제를 떠나 이번 앨범에서 바실리스 자브로풀로스의 연주는 질감은 다르지만 환상성과 정서적 깊이 그리고 만족에 있어 분명 70,80년대 키스 자렛에 필적할만하다고 본다.